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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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인간의 존엄과 희망 그리고 미래를 담아야 한다.희망이 있는 교육은 학생들의 삶에 활력이 된다. 학교에서 생활하며 예전에 몰랐던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도록 학교가 돕는다면 아이들에게 학교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희망에 찬 곳이 된다. 우연한 기회에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무한의 끼를 발견 하였을 때 학교가 그것을 어떻게 키우고 가꾸어 나아갈지 안내하고 응원까지 해 준다면 학교는 특정한 분야의 유망한 꿈나무들을 키우는 희망 공간이 된다.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구조화된 세상의 물정에 적응시키기 위한 실용만 제공하는 곳에서는 희망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기능을 반복하고 어디엔가 끼워 맞춰질 기계의 일부를 만들게 될 뿐이다. 사회 기능론적 시각에서라면 나름 가치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살고 숨 쉬는 것, 살아가기 위한 그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이유와 나의 존엄을 확인하고 즐겁고 행복한 나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공부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희망이라는 말과 함께한다. 존엄이 없는 곳에서는 희망도 싹을 자라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학교는 존엄을 경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존엄을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 존엄 그 자체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존엄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학교는 적어도 인격의 장이고 인격을 가진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존엄 경험의 장소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적 가치가 변했음에도 아직까지 성적이 중요한 기능 중심의 장으로 인식한다. 물론 변화와 흐름을 예견하고 달라지려는 교사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내 아이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아이와 함께 설계하는 새로운 교육의 풍토가 선을 보이는 가치 병존의 어수선함이 함께 한다. 그래서 교육관련 뉴스에는 가치가 대립하는 댓글들이 차고 넘친다.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 중요한 단어가 성취기준이다. 성취기준을 평가기준이라고도 한다. 이를 제시한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의 성취 목표를 설계하고 학습을 한 뒤 학생들의 성취를 등수로 환산하는 것이 아닌 정성적 평가를 하여 정량적 평가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학부모와 적응의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되는 교육적 분위기 때문에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아직도 수능이 중요하고 수능 100%를 외치는 것이 공정성을 담보하는 기준이라 생각하는 교육 관련자들이 많다. 필자도 이를 거부할 수 없는 구조변화에 대한 거부감이라 생각한다. 정성평가보다는 서열의 가치를 공정으로 인식하는 교육풍토가 변함없이 건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큰 변화가 다가왔다. 코로나19 이다. 이 사태는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경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질서와 힘의 구성을 재편성 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세계화’, ‘도시화’라고 하는 공간의 관념과 가치를 변화시키고 있다. 자본 경제의 당연한 흐름 ‘금융화’또한 변화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변화 또한 감지된다. 인간관계가 가장 큰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사회의 구조변화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교육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번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정립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커다란 변화와 흐름에는 간과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담아 재구성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등수와 정량지표인 성적의 서열화 같은 잘못된 관행을 애써 포기하지 못했다면 이번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라도 고쳐 보아야 한다. 그 속에 교육의 이념으로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담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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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온라인수업.교사생활 25년이 되어가지만 요즘처럼 바쁜 날은 없다! 학교에 학생도 없는데 하루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은 온라인 수업준비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위해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익혀져 있던 수업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전혀 다른 수업을 준비하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학부모 또한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학부모님은 더더욱 힘든 경험을 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하루 종일 같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토로(吐露)하는 분이 많다. 늦잠을 자는 자식을 깨울 때부터 온라인 수업을 제때 맞춰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혹시나 공지사항에 수행활동이나 과제가 있는 지 일일이 챙겨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맞벌이 부부는 더더욱 마음 아프다. 내 아이가 혹시나 이런 시기에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는 두려움에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한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학교가 자신에게 이렇게 자유로운 곳이었다는 것을 지금이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눈은 칼처럼 나에게 붙어있고 방학동안 촘촘히 짜 맞춰진 사교육 시간이 연장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온라인을 통한 수업 준비의 안내문과 학교의 공지사항의 내용들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리고 중3이나 고3은 이미 일과 중 온라인 수업을 받고 곧바로 학원수업을 들으러 가야한다. 일과 중 온라인 수업이 있을 때는 옆에서 다른 짓을 할까봐 걱정하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도 어려운 일이다. 코로나19로 가정이나 학교도 모두 바쁘고 혼란스럽다. 이는 모든 나라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 정부도 교육당국도 이런 상황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보편적 기준에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학교를 개방하고 정상수업을 진행 하라고 말할 수 없다. 온라인 수업의 진행에 대해 이해가 어려운 부모님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온라인 수업은 실시간 쌍방향 수업과 콘텐츠를 제공하고 그 수업이나 학습내용을 얼마나 경청하였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점검하는 형태의 온라인 수업이 있다. 쌍방향 수업 방법은 다양하다. 밴드와 같은 SNS를 이용하여 학생들과 실시간 대화를 통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좀 더 발전적인 방법은 화상 카메라나 노트북 휴대폰을 통해 교실 수업처럼 하는 수업이 있다. 콘텐츠 제공 수업은 다른 인터넷강의 선생님의 동영상등을 활용하여 필요한 만큼 잘라내어 수업 자료를 제공하거나 EBS강의를 통째로 제공한다. 특성화고등학교처럼 특성화된 강의 정보가가 없는 경우에는 담당 선생님이 직접 수업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수업의 과정을 얼마나 들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EBS온라인클라스나 구글클라스룸에 자료를 올리는 경우가 대표적인 온라인 수업의 형태이다. 학교에서는 초등 중등 고등의 수준에 맞게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고 계획한다. 학교마다 또 어떤 플랫폼을 쓸지 어떤 수업 방법을 중심으로 온라인 수업을 개설할지를 고민하고 회의를 하고 연수를 하고 자료를 준비한다. 무언가 제대로 된 수업 준비가 되어가는 가 싶지만 사실상 학교에서의 수업을 대신할만한 좋은 방법을 찾기는 어렵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학부모님의 이런 심정을 들었다. 자녀들이 온라인 수업을 할 때 강의를 켜놓고 다른 짓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어떤 방법의 수업이든 학생들이 수업의 내용과 과정을 잘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면 부모님도 안심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렸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수업을 하든 협력학습을 하든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다른 일을 하는 학생을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요?’ 라고 말씀드렸다. 수업을 하는데 책상 서랍에 넣어둔 휴대폰으로 아무도 모르게 SNS를 하려 하는 학생이나 다른 짓을 하는 학생은 이미 그 수업보다 다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온라인 수업이든 오프라인 수업이든 다르지 않다. 이번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교사들도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제일 먼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공간이고 학교에서의 교육활동은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알아가고 있다. 이번 온라인 수업 이후의 교사는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지역사회 그리고 교육 당국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고민하고 있다. 교육의 지각변동이 교육을 담당하는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일이다. 미래 교육의 변화된 모습이 좀처럼 남의 일이고 먼 훗날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육 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 당국이 코로나19로 부득이하게 하고 있거나 준비하는 온라인 수업을 통해 미래를 학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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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盲從).맹종(盲從)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른다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맹종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의도적 맹종은 있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거나 특정 이익에 편승하기 위한 의도적인 맹종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맹종은 특정 조직이나 이익집단에서 강요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절대적 권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그렇다. 조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옳고 그름보다는 위계서열에 따른 절대 권력이 지위를 결정하고 조직의 상위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맹종이다. 종교적 교리가 시대상황과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교주의 해석과 이해관계에 순응하여 비합리적인 일을 강요하거나 자행되더라고 그냥 인정하고 그 주문에 추종하고 따라야 하는 상황 또한 맹종이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며 자신의 꿈이 조폭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영화가 폭력과 살인을 얼마나 잘 그렸으면 저렇게 자신의 꿈을 조폭이라고 말할까 귀를 의심했다. 최근에는 조폭보다는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의 희망이 건물주이거나 부동산 재벌을 꿈꾸고 있는 것을 보면 자본이라는 것이 이미 맹목적 추종의 대상이 되지 않나 생각하게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파는 행위를 감수 할 수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 학생들의 가치관이나 희망사항이 돈과 직결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돈이 맹종을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이는 돈을 주는 자의 요구에 맹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 코로나19의 상황을 보며 특정 종교집단의 맹종을 확인한다. 종교가 맹종을 강요하지 않지만 종교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지도자들은 맹종을 신앙심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를 강요하고 그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그 대가를 교리로 교묘히 포장하여 강요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 생각되더라도 그 강요가 강압적일수록 당근과 채찍을 교리로 강요하고 추상적인 특혜를 제시하고 추종을 강요하게 되면 어느새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이나 인권의 침해 까지도 감수해야 할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다. 아니 때로는 이를 순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나 한국에서 비이성적 종교 집단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학습되어진 이유 때문이다. 즉 교육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어지고 그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학생들의 가치판단에 비판이라는 것이 부재된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이란 비판적 사고가 필수이다. 학교 교육이 복종과 일관된 보편화를 전재로 이루어질 때 개인의 특수성이나 상황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선택이 부재되고 그 결과가 맹목과 맹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말해주는 학술적인 자료가 있다. 그것은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이다.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이란 인질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범죄자에게 잡힌 인질이 시간이 지나면 전체적인 상황과 자신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따르고 동조하는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 인질강도 상황에서 범인이 주는 인권의 침해는 아예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이고 당연시하면서 범인이 가끔씩 베푸는 호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범죄에 동조하게 되고 범죄를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따른 증후군을 말하는 것이다. 스톡홀름신드롬의 대표적인 사례가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이랑 같이 살면서도 남편을 정서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사례로 드는데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런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을 보면 이 증후군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런 비이성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특히나 이성은 무의식의 가치들이 학습되어진 것이므로 사회적 교육적 맥락에서 문제를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의 교육은 권위적이었다. 50년대에는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관료로 일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60년대 대학을 나오면 취직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에 학교는 신분을 바꾸는 중요한 디딤돌 이었다. 이때 학교는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는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을 경험하고 배우는 장소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아침 교문에서 맞고 훈육당하고 교실에서 아무소리 못하고 선생님의 강의만 듣고 질문하면 욕을 얻어 들었던 학생들이 존엄에 대해 알까? 존엄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사회에서 존엄의 가치를 실현하고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으로 유신정권을 경험하고 군부의 연장이 지속되던 시기에 사회적 질서를 강압적으로 해야 한다는 대표적인 표현이 ‘전두환 때가 좋았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보다, 개인의 존엄을 기반으로 한 인권보다 획일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이 더 좋다는 말이다. 이는 오랫동안 학습되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직도 우리 어른들의 입에 붙어있다.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상태를 경험한 사람이 사회에 순응하고 예스맨이 된다는 말일 것이다. 맹종은 결국 학습된 것이다! 종교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집단의 행태를 보면 사회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맹종이 있다. 그 안에 합리적 비판은 무시되어진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복종의 굴레가 그 사회를 그렇게 만든다. 사이비종교의 교리가 유독 잘 먹혀 들어가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맹종을 만들어낸 그 사회의 구조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의 대화에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비판이 넘쳐나야 사회는 안정적이고 창의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맹종하는 사람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맹종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존엄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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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교육칼럼.곧 개학이다. 학생들에게는 조급한 마음이 들게 하는 답답한 시간이다. 새 학년 새 학기를 준비하며 뭔지는 모르지만 원대한 목적을 설정하는 학생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등교가 싫어서 좀 더 긴 방학을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원대한 계획을 세운들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망할 지라도 그런 준비가 있는 아이를 보며 우리 부모는 희망을 갖는다. 부모나 아이들이나 모두 약간의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섞여 미묘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이 시기의 묘미이다. 이럴 때 아이들에게 부모나 선생님이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그것은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달라질 건가 하는 물음이다. 이런 물음은 조급함만을 더하게 한다. 묻지 않고 간단하게 잘할 수 있어 또는 즐거운 일이 많을 거야 하는 응원이 오히려 반가울 뿐이다. 그건 우리 부모도 모르는 새로운 경험을 우리 아이들이 미리 예견하고 알 수는 없을 테니까! 학교는 경험의 장이다! 경험이 없는 또는 경험이 어린 아이들에게 현자처럼 움직이라 하는 것은 어려운 추상일 뿐이다. 또한 옳고 그른 것을 가치 없이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단지 이제 마지하게 될 새로운 학년의 경험과 가치를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좋은 경험만 있으라고 추려주는 것은 현명한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까지 부모의 잣대로 세세하게 계산해서 경험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건 부모의 경험일 뿐이다. 새로운 경험을 신나해 하는 아이들은 성장의 폭이 크다. 또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부모님은 참 멋진 부모이다. 경험은 도전이고 그 도전에서 얻은 가치는 다른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로 고스라니 남기 때문이다. 이런 수많은 도전의 경험이 실패를 거듭하고 반복된 경험으로 지속해서 축적된 자들을 우리는 능력자라고 한다. 능력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도전을 두려워하는 부모는 아이에게 위축되고 한정된 경험만 제공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경험은 규격화된 시스템에 잘 적응하게 할 뿐이다. 그 뿐이다. 그래도 그런 경험이 나쁘지는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나 손해는 끼치지 않은 테니까! 하지만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는 능력자는 되지 못한다. 경험이 없으니까! 뜨거운 불에 데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는 불의 무서움을 오감으로 적응하지 못한다. 불에 데면 뜨겁다는 것 그리고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경고나 하면 안 된다는 지식으로만 알 뿐이다. 뜨거운 불이나 물에 덴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뜨겁고 아픈 것만 아니다. 상처의 변화에 따른 여러 변화를 경험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경험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우연히 여러 차례 경험한 아이들은 그 경험이 적은 어른보다 더 자연스럽게 다양한 대처 방법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그런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치료법까지 전수한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능력이다. 좋은 경험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찍 버려야 한다. 실패한 경험은 나쁜 경험이 아니다. 한 번도 실패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영광의 순간에 그것이 영광인 줄 모른다. 삶의 기쁨을 경험하기 어렵다. 실패한 사람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본인이 얻고자 한 결과를 얻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한다. 그리고 몰입한다. 순간순간 몰입을 경함하는 아이들은 그 기쁨과 희열을 알고 느껴 보았기 때문에 지루한 반복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공자 또한 “가장 위대한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데 있다.”라고 말했다. 곧 경험은 도전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마다 현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주는 인생의 선물이다. 경험의 가치척도는 없다. 경험은 모두 다 가치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사회 구성원들에게 절대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경험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아빠의 지갑을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갖기 위해 손을 댄 어린아이가 경험하게 될 회초리나 비난 그리고 사랑의 타이름은 아이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 경험이 일깨워 준 소중한 사회적 가치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보다는 더 단단한 규범과 도덕으로 남게 될 것이니까! 우리 아이가 힘들어 할 때 그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겁을 먹고 당황해 할 뿐이다. 그런 아이에게 ‘하지마라’, ‘가치가 없다’ 등등의 제재나 가늠좌 지도는 좋지 못한 교육이다. 실패한 경험에 응원을 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만 딱 그 정도로만 부모의 역할이다. 이래라 저래라는 부모의 경험이다. 경험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 어른이 보기에 어리숙하더라도 실패할 것 같더라도 잠잠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의 꾸준한 노력과 도적이 반복될수록 그는 그 경험으로 많은 것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빠른 방법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다. 참 빠른 목표 도달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박수치고 칭찬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빠른 도달을 가능하게 한 능력 속에는 경험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능력의 차이니까! 시간의 차이는 나더라도 실패를 경험하고 위기와 극복을 반복한 사람이 특정한 목표에 도달 했을 때 그때 그의 능력은 견고한 성처럼 그 사람의 인생을 지켜준다. 크기가 다르다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치가 다르다고 그 사람의 경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고 그 사람의 경험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가 없었던 사람들이 하는 경험이다. 딱 그 정도이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 매일이 새롭고 기대되는 모험으로 가득하다. 그런 세상 담대하게 모험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일단 부딪쳐보렴 힘들 때 내가 너의 옆에 있어줄게. 세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네가 경험하는 세상에 너와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끼리 위기를 극복하며 함께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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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智惠sophia).‘‘지식기반 사회’ 정보 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지식의 가치가 사회의 모든 정치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되었다. 지식과 정보의 가치는 무한하다. 미래사회의 원천이 지식과 정보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기에 무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야간 자율학습을 통해서라도 학생들에게 반복된 활동을 강요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암기력을 향상 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 될 것이다. 지식의 주입 능력이 부족한 아이에게는 기술적이든 의학적이든 반복학습이나 치료를 통해서라도 지식의 양을 늘리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식을 목적으로 한 활동이 교육과 사회 경제적 가치창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식은 내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식한 친구는 성적을 테스트 하는 학교에서 능력자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빠른 시간에 자신이 습득하여 암기한 정보를 빨리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학생이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 않아 보인다. 지식을 활용하여 논리적으로 연산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여 내면화하고 그것을 상황과 필요에 맞게 재가공할 줄 아는 학생 앞에서는 박식은 그저 단순한 기능일 뿐이다. 지식은 세상의 이치를 표면화 한 내용일 뿐이다. 그것을 가공하고 연산하여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분법에 의존해 그 차이를 나누었을 뿐 사실상 지식과 지혜는 인간이 세상을 재구성한 과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메타인지를 상호 관계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한 단계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수준의 지식과 경험을 누적시킨 결과이다. 내가 틀린 것을 상대방이 지적하고 또한 상대방의 논리적 가치의 모순을 또 다시 찾아내는 무한 반복의 활동을 시작한 인간이 누적시킨 결과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 지식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지식은 단순한 현상으로만 정체될 뿐이다. 이는 지식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나 상상속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끼리 상호 협력하면서 기존의 지식에 논리적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는 논리적인 노력 즉 지혜가 전제되어야 미래가 있다는 말이다. 단순한 지식의 암기는 우리 인간의 발전에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개발하고 있는 인공 지능이 단순한 지식을 데이터로 하여 간단한 창의적인 일까지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최근 특정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말을 결어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약한 지능의 인공을 뛰어넘어 영화처럼 어떤 결과를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강한 인공지능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간의 교육적 목적을 지식이라는 제한적인 내용을 얻는 것에 한정 짓기는 좀 그렇다. 미래 교육도 이제는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회적 지표를 양산하는 기관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지식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보다는 지식과 단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호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협력하는 일들에 너무도 소홀하다. 개인의 지적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익숙해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는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대화가 없는 학교. 질문이 없는 학교. 그것은 사회적 자폐를 양산하는 곳일 수 있다. 병적인 증상만 자폐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단절을 경험하는 많은 친구들을 보면서 자폐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사회적 병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는 가족에서도 사회에서도 여려 자폐적 현상들을 목격한다. 가족으로 있으면서 대화 한번 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여 가족관계에서 얻을 중요한 교감을 상실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자신의 주장만을 이야기 하고 합의점 없이 비논리적 사고에 휩싸여 혼잣말을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그래서 나는 자폐증을 개인적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폐증은 사회적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폐증과 사회적 현상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자폐증(Autism)이란 다른 사람과 상호관 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 아동기 증후군이다. 자신의 세계에 갇힌 상태‘라고 하여 붙여진 발달 장애이다. 증상은 상호 관계의 장애와, 의사소통 및 언어장애, 그리고 행동 장애가 특징이란다. 일부 자폐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특별한 천재성을 가진 자폐증을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한다. 자폐증 환자 10명중 1명은 천재적인 역량이 있다고 한다. 스테판 원샤이어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영국의 예술가이다. 그는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가 본 사물의 실체를 천재적 기억력에 의존해 정밀하게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런 서번트 증후군은 좁은 분야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기억에 의존하는 것으로 절대음감, 암산, 그림 등이 천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능력자의 개인적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여도 그 능력이 사회에서 아무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테판 원샤이어를 사회에 선보이게 한 조력자가 없다면 그의 존재도, 그의 천재성도 무의미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재성을 가진 수학적 능력을 어디다 쓰고 활용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소통의 부재는 결국 무의미한 능역일 뿐이라는 것이다. 천재적인 능력도 사회 구성원과 소통하고 협력해야 사회적 가치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결국 지식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의 경험의 결과를 내용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인간과 인간이 서로 협력하여 현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미래 사회에서 독보적 능력을 가진 인간은 없다. 있어도 무의미하다. 모든 기술과 과학 그리고 의학들은 개인적 능력으로 만들어진 영역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모두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다. 이 데이터의 가치를 상상력으로 재개발하고 그 상상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인간끼리의 협력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교육의 근간은 협력이다. 그리고 소통이다. 교육에서 지혜로운 인간을 만드는 노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