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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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 (4)이민숙 여수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A)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B)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원제:<용정의 노래>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1933년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 한다. 시인 윤동주가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 필자가 줄그어 표시한 부분은 작사를 했던 윤해영의 노래 구절이 아니라 용정에 발 디뎌 본 적 없었던 작곡자 조두남이 임의로 개사를 했다고 한다. 원래의 표현은 ‘눈물 젖은 보따리’(A)와 ‘흘러 흘러온 신세’(B)라고 한다. 어쨌든 그 시절의 용정과 만주, 우리 민족의 산천은 일제의 침탈에 먹을 것 입을 것 다 빼앗겨 눈물 젖은 보따리의 신세였던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그늘져있는데, 이 굴곡진 심리적 박탈감이 2023년 8월, 이 날 이 시각까지 이르렀다는 게 통탄할 뿐이다. 저 거친 꿈의 선구자들은 무덤에서조차 벌떡 일어나 구천을 헤맬 것만 같다. 가슴 깊이 사죄하는 아침이다. 여기에서, 시 읽기의 한 지혜는 역사의 사실과 원저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읽어나갈 것, 그리하여 창작의 진실성을 확보한 후의 시어 선택의 적절한 과정을 습작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완성의 과정에서 중요하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에 있어서의 상상은 좀 더 비판적인 시각을 담보해야 하며 그 비판에 쓰이는 언어선택의 적절성도 사실이 담보된 후에라야 적확한 표현의 미를 구사할 수 있을 터!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윤동주/ 엄연한 시절, 청춘의 시절, 윤동주의 시는 어둠 속 별이다. 사위는 깜깜 밤이나 시어가 가리키는 절실함이야말로 시에서의 가장 빛나는 절절함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는 용기와 함께 언어를 뱉는 순간에도 무서웠고 부끄러웠다. 그것은 ‘ 몸 둘 하늘’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더럽혀진 조국의 하늘 아래 찢겨진 민족의 영혼 곁에서 늘 시를 썼으나, 한 마디 결연하고 빛나는 시어를 직조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했다. 모든 시가 너무 쉽게 써져-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부끄럽다 하였다. 그의 부끄러움은 시 ‘서시’에 더욱 명징하게 표현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윤동주의 마지막 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온갖 생체실험의 혹독한 고통으로 시달리다가 29세 된 1945년 사망하고 말았던 윤동주, 역사의 오류요 인류 잔혹한 전쟁놀음의 오류로 희생된 윤동주, 그의 영혼이 빚은 시들은 그러나 맑고 아름답다 아니 처절하다. 또한 결연하며 치열하다. 우리의 시 정신이 탁류에 휩쓸릴 때, 헹궈야 할 때, 윤동주의 혼이 담긴 시야말로 읽고 또 사랑할 그런 시의 원류가 될 것이다. 시창작이란, 역사의 오류를 톺아가는 작업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질펀한 그 오류의 시기, 지금도 시의 본령은 우리 민족이 살았던 땅과 저 먼 바다를 관통하고 있다. 역사와 역사의 인물을 통해 시 창작을 실현할 작금의 과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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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3)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 소장 , 시인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 ... ...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 부분/ 고정희/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그녀에게 지리산은, 뱀사골은 얼마나 절실한 사랑의 공간이었던가!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고독한 서사를 지리산만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그녀는 끝없이 그 공간을 밟았으며 젊고 야성적인 생의 시간을 노래했다. 참담했던 역사와 비릿한 운명에의 예감처럼 지리산을 춤췄고 질리도록 썼다. 지리산은 그녀의 청청한 펜이었으며 땀방울이었다.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구름처럼 바람처럼/승천합니다” --<지리산의 봄1> 부분 **우리의 지리산을 고정희는 그대의 지리산으로 그대의 지리산을 살아있는 영혼들의 웃음소리로 가버린 영혼들의 슬픈 노래소리로 후여후여 ‘우르르우르르 우레소리’처럼 승천시킨다. 아... ...그녀는 그곳에서 또한 신화적으로 살과 뼈마저 거두며 승천하였다.(그때 나이 43세) 1991년 6월 9일.『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유고 시집을 남기고, 그녀는 지리산 맑은 계곡의 흐름처럼 크나큰 여백을 남겼다. 웅혼한 그 여백, 고정희 정신이 되어 지리산의 물소리 바람소리로 불렀던 열사들처럼(‘지리산의 봄9’에서 포효한 그 이름들, 김주열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우리 곁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와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 ...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 ... <지리산의 봄 4-세석고원을 넘으며> 부분/고정희/『지리산의 봄』 **80년대의 그 피묻은 꽃잎들이 세석고원에 파도친다.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이라... ... 그 절망의 시대를 넘어가야 한다는 절규가 지리산으로부터 뜨겁게 메아리친다. 고정희는 지리산에 갔다. 지리산을 울었다. 역사를 품고 칼을 품고 진저리치는 슬픔 속에서 빙산 갈라지는 쩍쩍 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들판처럼 걸어걸어 당도해야 한다고 한다. 드디어 우리가 당도한 곳은 그 어디인가! 자운영꽃 아득한 고향의 들판인가? 끝내 잃어버린 그곳을 그대는 썼는가? 그토록 갈망한 시의 수평선은 아득하기만 하다. 시창작은 아득히 멀어져가는 공간의 맥락을 바느질해야 하는 수선쟁이(시인이야말로 시대의 바느질 장인)의 새벽인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발걸음 하나하나 공간 한 처소 한 열망은 시가 되어 꽃 피어난 것이다. 그런 공간 그대는 가졌는가? “비 오는 날엔 금당댁 할머니 약 사러 온다 인기척에도 울컥 일어서는 가슴 편도부터 기관지까지 무성하게 뻗은 세균들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바이러스 집 나간 아들 걱정 “지침이 많이 나 머리도 톱질하는 것 맹키로 아프고 온삭신이 절구가 내리치는 것 같당께 잘 지줘 한 방에 낫게” 온전한 것이라곤 겹겹이 속옷 껴입은 마음뿐 그것마저 놓으면 가벼워질 텐데 밤마다 이불 덮어주고 싶은 아드님은 꼭 돌아올 거예요 색색의 알약 내려놓고 할머니의 거북손 잡아주었다“ --<겨울 처방>/김청미/『청미 처방전』/천년의시작 “오늘이라도 팍 죽어버렸으면 좋겠구만 목숨은 왜 이리 고래 심줄처럼 질긴지 산목숨 맘대로 끊어버릴 수도 없고 자다가 영영 눈 감으면 원이 없겄어 오래 살먼 살수록 자식들이 고생이랑께 근께 나헌테 더 약 먹으란 소리 말랑께 근께 약을 자셔야지요 갈 때 가더라도 건강하게 살다 가야지 산송장맹키로 자리에 누워 벽에 똥 바름서 자식들 힘들게 하먼 안 되니께 이것저것 약을 먹어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식들 맘 편하게 하는 것이랑께요 --<우째야 쓰까?>/ 김청미/『청미 처방전』/천년의시작 **저곳은 화자(시인)의 직장인 약국이다. 약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가 시의 중심결이다. 약국에서나 주고받을 수 있는 생로병사의 풍경 언어들, 무엇 하나 만만치가 않다. 죽고 싶다 약 먹기 싫다 집 나간 아들이 안 돌아온다, 거북손 할머니의 꺼칠한 마음이 가여워서 어쩌나... ...약사의 처방으로 받아드는 건 마음! 한 위로를 뒤로 하고 가는 할머니 그 공간을 서러움으로 채운다. ‘겨울 처방’ ‘우째야 쓰까?’ 얼어붙은 생의 상처들, 그 사유가 공간의 미학 아닐텐가! **꼭 어디라고 특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치자. 그러나 시적 체험은 정신만은 아닐 터, 글이란 어떤 경험이든 추상이든 일단 살아버린, 살고있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곳이 씨줄이라면 날줄이라는 시간은 필요충분조건! 아무리 텅 빈 삶의 지향점이라 해도 시적 체험은 향기롭고도 정결하거나, 피비린내 나는 목숨이 오고가거나, 어둠과 빛의 양면적인 체험을 달고 다닌다. “북위 45동 동경 160도. 바다에 부딪히는 바람의 피리소리 집어등 아래 부서진다. 하늘 향해 고개 들어도 마음은 자꾸 가라앉는다. 떠나온 날 만큼 남은 돌아갈 날. 아직 어창은 반도 차지 않았는데 외로움 벌써 가슴 채우고 남는다. 무선 침묵시간 3분, 송신 버튼 누르지 않고 하나하나 불러보는 이름. 해도 위 항로 짚어보면 눈은 손보다 먼저 고향땅에 닿는다. 망망대해 뜬 보름달은 고향집 창도 넘겨다 볼 것이다. 아내는 뒤척이다 그 달빛 덮고 잠들 것이다. 쿠릴 열도 따라 흘러오는 빙하 녹은 물결에 월광이 얼고, 선원 침실에는 잠들지 못하는 외로움들이 흔들리고 있다.” --<북태평양은 잠들지 못한다> 전문/이성배/『이어도 주막』/애지 **먼 먼 대양의 어느 지점, 그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아니 지나쳐본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망망대해의 저 외로움이나 고향에 두고 온(제2의 공간) 달빛을 화자는 쿠릴 열도 어딘가의 바다, 빙하 녹는 물결 속에서 보고 있다. 공간의 시작은 북위 45도 동경 160도(제1의 공간), 그것만으로도 시는 성공이다. 상상의 거친 물결 속으로 금세 데려다준다. 역설적인 것은, 되돌아보며 돌아갈 손바닥만한 고향땅이 다시금 시(독자)를 적신다. 시는 곧바로 출렁! 흔들린다. 갈수록 태산이다. 공간의 궤적을 더 바랄 것도 없다. 시창작의 산실은 이렇듯 각자의 체험 속에서 뜨겁게 번뜩이고 있을 터! “늙거나 상처가 심해 떠오를 힘조차 없으면 고래는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는다 허파가 터지기 직전의 긴 들숨으로 고래 살아가듯 사랑은 서로의 호흡 가슴으로 마시는 것 고래가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듯 당신 가슴에 사는 내 사랑도 그 가슴에서 죽는다 삶은 들숨 날숨 고르게 쉬는 것 사랑은 마음에 피우는 한 송이꽃 바다를 사랑한 고래는 바다 깊어 빠져 나오지 못한다.” ... ... ... --<고래는 바다에서 죽는다> 부분/이성배/『이어도 주막』/애지 **그의 ‘바다’는 끝없는 시적 공간이며 서사의 난장이다. 공간을 헤엄치는 고래가 곧 시를 헤엄치는 바다를 숨 쉬는데...시를 들여다보는 독자는 꼼짝없이 빠지고 만다. 시(바다)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죽는다 고래는 바다에서 그대는 사랑 속에서, 어느 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시의 경지인가? 그 공간은 시간을 담보하고 있지 않을 것만 같다. 빠지면 죽고 마니까. 화자의 바다 바다 그리고 또 바다, 설레임 속에서 풍덩 빠져버린 공간의 함몰지경이 시의 새 탄생지점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시는 파도치듯 바다의 푸르른 공간을 날고있다 그러므로 받아쓰기하라 어느 곳(공간은 무한대!)에 가면 연필에 침 발라 곧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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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2) ‘역설의 시’이민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오니 너나없이 반긴다 염려가 아니고 환대다 식당 여자는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내밀고 데면데면하던 이웃도 나를 보더니 얼굴을 편다 좌회전하던 먼 이웃도 우회전하며 손을 내민다 혁대 풀고 거웃까지 보여가며 봐봐 나도 석달 고생했다고 한여름에 얼마나 개고생이냐고 운전은 되냐고 팔 아니라 대가리였으면 좆 됐을 거 아니냐고 말은 그렇지만 정작 재앙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 재앙이 가져다준 새잎 기억들을 탈 없기를 원하지만 말짱한 것은 뻔뻔한 콘크리트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이 열리는걸 지난날의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별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라는 거울 앞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죽음 나의 죽음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미래가 말짱할 곳은 사막뿐 재앙이 준비돼 있지 않다면 우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 행복은 수백갈래지만 재앙은 한곳을 향해 있어 우리 모두 한곳 재앙을 바라보면서 얻는 구원은 서로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의 기억이 사소한 일에도 우리 모두를 뒤흔들어놓기도 한다는 것” -<재앙의 환대>전문/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작과비평 #‘재앙’은 환대 받을만한 사건인가? 우리들의 일상이 흔들리고 안전하지 않고, 사랑이 깁스를 해야 할 만큼 탈이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얼굴을 펴게 하고 좌회전하던 그 등의 써늘함에서 우회전으로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고 손을 내민다. 바로 ‘재앙’의 진면목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그 사태를 통해 기억들은 그로부터 비롯된 ‘새잎 기억’들을 재상영해 낸다는 것이다. 말짱한 것들은 ‘콘크리트’라고, 그러나 기어이 부서져야만 간신히 ‘새잎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죽음’은 우리네 가여운 생의 깨우침에서 가장 거대한 칼로리원인가?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깨우친다니? 수많은 행복의 갈래가 아니라, 한곳 재앙(죽음)을 바라보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 사랑도 비참도 재앙도 어쩌면 그러한 ‘구원을 향한 대홍수’라는 것이라니... ... #시는 역설의 산물이다. 당연하다 그 이유, 삶이야말로 역설이니까. 예기치 않은 역설적 사태도 많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삶의 사태가 필연적 역설이다. 태어남과 죽음, 환희와 고통, 빛과 어둠, 더 말해 무엇하랴? 우연이라는 껍데기가 아차 그러한 필연의 형상들을 살짝 속이며 우리의 하루를 이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착각이 한시라도 생의 진실을 외면하게 하면서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할 뿐. 그렇다고 운명만이 생의 모든 것인가? 필연이 운명이라면, 역설도 운명일 터, 무엇 하나 시적 창조의 언어를 비껴가지 않으리.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 벌이 날아와 앉네 꽃은 이곳과 저 너머 사이에 피어 단절의 아픔에 위안을 주고 남은 자들은 인연의 안타까웁을 향기로 이어보려는데 꽃은 다만 자신의 생리를 다해 절정의 가쁜 빛깔을 토해내고 나는 앞에 선 여인의 진한 머릿결 향기에 발을 헛디디고 저 개새끼 때문에 내가 왜 우냐고 퍼질러 앉아 펑펑 우는 검은 상복의 여자 벌은 하루치의 삶에 몰두해 있고 죽은 자 앞에서 나는 벌겋게 삶에 취해 있고” -<조문>전문/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작과비평 # ‘꽃과 향기와 절정의 빛깔과, 벌과 여인의 진한 머릿결의 향기와, 하루치의 삶’과... ...죽은 자를 기억하고자 하나 이미 단절된 필연이 한 공간에서 교차하고 있다. 그 시간의 풍경은 지나가면 사라질 ‘헛발질’인가? 꽃은 늘 피지만 그냥 피어있지 않다. 그 향기 ‘절정의 가쁜 빛깔’을 토해낸 뒤 지고 만다. 삶은 꽃인가? 죽음은 꽃인가? 꽃으로 표현되는 그 역설이 ‘조문의 날’을 꽃피우고 있다. 시는 조문의 날을 꽃 피우는 언어의 유희다. 그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니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만은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일 것도 같다. 늘 언어는 존재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 꽃이라는 시를 피우고자 하며. 그러나 존재는 영원한가? 금세 시들어 버릴 꽃이 시다. 시인들은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왜 우냐고’하는 여인처럼 퍼질러 앉아 상복의 시를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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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 서서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뒤뜰 언덕에 아카시아꽃 하얗게 필 때 홀연히 사라져버린 오빠 그리워 동생들과 꽃잎을 씹어가며 울던 그해 오월을 생각한다 유리구슬처럼 눈망울이 반짝이던 우리 오빠는 몇 달을 감옥에서 살다 나온 뒤로 초점을 잃게 뒤돌아서 잠만 자다 잠꼬대를 하는 소리에 놀라 등줄기가 서늘해지던 그해, 여름의 끝 해마다 언덕에 아카시아꽃 흐드러져도 울 오빠 빛나던 눈동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하고 부르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웅크리던 그렇게 그렇게 사십여 년 세월이 흘러왔는데 울렁울렁 아카시아꽃 피는 오월이면 오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아직도 묻지 못한 말이 있는데 그해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에 잃어버린 구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에 두고 온 건지 제복 입은 장정들이 지나만 가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만 외쳐보는 오빠, 아카시아 꽃 피는 오월이 오면 찾으러가자 -오미옥, <아직 묻지 못한 말> 전문/ 『2023, 오월문학제 시화작품집』 “그 음악이 울릴 때 우리는 밖에, 안개 속에 있는 동료들이 로봇처럼 행진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었다. 음악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며 그들에게서 의지를 몰아낸다. 의지 같은 것은 이제 없다. 북소리 박자가 걸음이 되고, 반사작용으로 지친 근육을 잡아당긴다. 독일인들은 이 점에서 성공했다. 1만 명의 동료들은 단 하나의 회색기계들이다. 그들은 정확할 정도로 결연하다.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들고 나는 행진에 SS가 빠지는 일은 결코 없다. 저들이 창조한 이 안무, 죽은 인간들의 춤, 안개에서 나와 다시 안개로 나아가는 분대의 모습을 구경할 권리를 누가 저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가? 저들의(나치의 -인용자) 승리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부분 인간에게 묻는 일, 인간답지 못 한 그런 일을 두고 던지는 물음, 그건 잊을 수 없어서 또한 그러할 것일 터, 오월 광주가 그러하며 사월 제주와 세월호가 그러하며 이태원 사태가 그러하다. 아니 그보다 얼마나 더 많은가! 셀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역사의 핏빛 시간들은 차마 잊을 수 없고 잊지 못해 참담하다. 올해 ‘오월문학제’는 오월항쟁 43주기의 전체를 일순 불러온 행사였다. 오월의 정의, 문학의 실천으로! 라는 한 마디를 내세웠다.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오월은 왜 아직 어둠이며 신화적 올빼미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오월 광주는 아우슈비츠의 미메시스라도 된다는 말인가? 현재도 한국 사회에선 인간일 수 없는 권력자와 그의 하수인들이 오류의 잿빛 가로등을 켜고 있다. 모든 사건들은 조작되고 검찰들만이 정의의 칼날을 움켜쥐고 있는 냥 겁박하고 있는 나라. 거대한 쇠사슬이 한반도를 옥죄고 있다. 구슬처럼 빛나던 시인의 오빠의 눈동자는 어디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건가? 사회적 건강성으로도 그 기억을 치유할 수 없을진대... ...잃어버렸다 또 잃어버려야 할 것 같다. 영영 찾아낼 수 없는 오월의 정의, 아니 사계절의 정의가 흙탕물에 젖어가고 있다. 오월항쟁기념탑 뒤 새로 조성된 묘역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리영희 선생님을 참배하고 왔다. 술 한 잔 따르고 왔다. 말의 정의와 글의 결기에 빛나던 바른 언론인 리영희의 묘소 앞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언론을 생각했다. 누가 시대의 배반자들인 언론인들의 정신에 채찍질을 가할 수 있을까! 구 묘역에 안장된 시인 김남주는 시로 그 묘안을 일갈했다.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여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여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이여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여 돌을 세워 마을에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이여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 민중이여 ( .... ....) 이제 빼앗는 자가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 -시 <민중> 부분/ [김남주 평전]/ 김형수 김남주 생애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해 낸 김형수의 저서 [김남주 평전]이 올해 오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서 김형수는 말한다. "고백하건대 '지금 이곳'의 내가 김남주를 기억하는 일은 날마다 닥쳐오고 있는 '허황한 미래'에 대한 저항의 서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한 수단이었다. 한때 그의 시는 정치적 태도 때문에 칭송되었으나 이제 삶의 위대한 여정을 이끈 정신적 유산으로 재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촛불'같은 영혼들이 김남주 이야기를 꼭 간직했으면 좋겠다. 오월의 촛불이여 타오르려 하는가? 세상의 영혼들이여 이제 곧 위대한 여정으로서의 한 인간 김남주의 동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구에게나 밥 한 공기는 소중하다. 이팝꽃 피는 망월동에서 우러렀던 민중이라는 밥 한공기의 정의를 생각하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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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 ‘[다음 소희]와 악의 평범성’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클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광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1>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넓은 운동장에 신참 훈련병들이 예쁜 토끼들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교관들이 뛰어들어 칼로 토끼들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토끼들의 껍질을 벗겨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훈련병들에게 던졌다. 어린 병사들이 내장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도록 명령했다. 명령은 날마다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훈련병들 스스로 토끼들의 뱃속에 칼을 담가 노를 저었다. 미군 병사들이 베트남전쟁 투입 전에 받은 이 담력훈련을 ‘토끼훈련’(rabbit lesson)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의 수많은 학살은 우연도 실수도 아니었다. --<토끼훈련>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용어(한나 아렌트를 가리키며 언급하는)가 아니다. 잔인함도 아니다. ‘평범성’이다. 인간의 평화로운 일상과 현재적 삶으로의 놀이터처럼 기능하고 있는 페이스북을 통해 노출되고 있는 오늘 이 시간의 ‘정상적 평범성’이다. 그러나 정상인가? 평범한가? 내 존재의 평범성과 악의 평범성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 우리는 다함께 「다음 소희」 영화를 봤다. 그들에게 ‘소희’는 착한 딸, 책임감 강한 제자,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직업을 소개받고 열심히 근무하는 여고생이다. 소희는 자존심 상하게 하는 고객을 달래고,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들의 마음을 돌려 재계약하게 하는 콜센터 실습여고생이다. 최고의 통화기록과 고급한 성취율에 올랐던 즈음, 고객들은 해지할 권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소희는 해지를 받아준 순간 회사의 해충이 된다. 소희에게 ‘전화’는 걸려오는 단순한 통화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만큼 보수를 높여주는 ‘노동의 성취 도구’이며 회사를 견인하는 탱크의 바퀴인 것이다. 끝없는 전화... 끝없는 설득...끝없는 폭력적 대꾸를 통해 얻어지는 노동력 평가, 그러나 월말의 결산 결과는 그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노략질에 다름 아니다. 현대 자본은 더욱 견고하게 노동을 착취하고 입막음하고 그러므로 악하다. 그 ‘악’의 연대는 자본뿐만 아니라 소희를 그 현장에 보낸 학교 선생님, 학교 게시판을 가득 채운 취업률, 취업과 취업률과 학교의 미래 비젼과 상위 기관의 조종이 영화 화면을 숫자로 채운다. 숫자의 평범성! 피타고라스의 현현들이 21세기의 숫자를 신으로 받든다. 그 숫자판 안에 갇힌 수많은 소희들... ...‘소희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달성하고자 하는 숫자(자본)속으로 매몰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평범성이 아니라고? 소희를 던져버린 숫자! 거대한 빅데이터!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생명인가 숫자인가! #인간과 토끼가 죽어가고 있다. 역사의 토끼는 이미 충분히 죽었으나, 살아가고 있는 존재 핏빛 동백으로 떨어져가는 젊음, 악의 평범성 속에서 지금도 ‘다음 소희’들은 숨 막히다. 카나리아의 마지막 변명조차 들리지 않는 깊고 어둔 갱 속에서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죽인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시간만이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건들과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악의 평범성을 건드릴 수 있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시의 비범성이다. 시는 평범성과 비범성을 두루 어깨동무하며 은유와 상징의 한 획을 긋는 현재적 표현방식이다. 시여 악을 부수는 악으로 가자 시는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