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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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과 밥 호프찰리 채플린(1889~1977)이 미국에서 활동했을 때 어느 곳을 여행하는데 그곳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 축제를 열고 있었습니다. 기웃거려보니 실로 기묘한 장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것은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였습니다. 자부심과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신분을 숨긴 채로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겨우 3등!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의 성적표였습니다. 젊었을 적 제 꿈이 영화배우였던 것을 차치(且置)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었던 시기는 늘 과음으로 탁한 생각과 행동으로 젖고 절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살 만큼 살았고 알 만큼 알았고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 등을 경험 해 본 터라 나름대로 찰리 채플린의 소위 그 상황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채플린이 자신의 흉내 내기 대회에서 겨우 3등을 한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1. 이미 성공한 입장이라서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2. 그런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3.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은 물론 하나의 이벤트로 여겼다. 4. 우쭐한 마음으로 관객에 대한 배려와 매너가 부족했다. 5. 풍족했던 시기라서 절실하지 못했다. 반면, 이 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은 (확인할 수는 없고 1등 했다는 설이 있음) 20세기 미국 코미디계의 황제인 밥 호프(1903~2003)였습니다. 알려 진대로 밥 호프는 어디를 보아도 미남 이거나 훈남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는 너무나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표정으로 수많은 오디션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던 어느 날 한 오디션에 도전했는데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오히려 밥 호프가 알아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처럼 심사위원이 심드렁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자료는 다 보았으니 애써서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고 혹시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저의 특기는 사람들을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우리 심사위원들을 바로 웃길 수 있을까요?” 그나마 자기에게 조그마한 관심을 보이는 한 심사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밥 호프는 시험장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응시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습니다.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그냥 귀가하십시오. 바로 지금 심사위원 모두가 만장일치로 나를 오디션에 합격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최고의 코미디 밥 호프는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밥 호프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그는 그만큼 절실했다. 2. 그런 이유로 항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3.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과가 좋은 것은 당연하다. 4. 수 없이 떨어지는 오디션 과정에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5. 그는 항상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오디션 현장에 임했다. 찰리 채플린과 밥 호프에 관한 10가지 나의 생각은 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변(辨)일 수도 있겠지만 저의 꿈과 이상(理想)이었던 영화배우와 웃음치료사로서의 좌절이나 갈등, 또는 포기 등과 맞물려 있기에 실제로는 제 인생 자체에 대한 이유나 변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위의 10가지를 좀 더 일찍 터득했고 목표 의식이 뚜렷해서 인생을 더욱 치열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았더라면 영화배우나 웃음치료사로 훨씬 성숙한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자의 변명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자화상에 슬그머니 무대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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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준 선물김상훈 수필가 신묘년설날 모처럼 집에 온 아들에게 덕담 몇 마디를 하고 난 다음 금연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망설임 끝에 어렵게 내 의견을 제시했는데 녀석은 별다른 기색 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으면서 예! 예! 하면서 대답하는 품새가 영 믿겨 지지 않았습니다. 끊을 의지는 확고한데 그게 잘 진행되지 않는다든가 실행을 해 보지만 항상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런 기본적인 대답도 아닌 그저 건성으로 내 물음에 성의 없는 반응만 하고 있어서 녀석이 딱히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면서 성묫길에 나섰습니다. 왕복 3시간쯤 소요되는 부모님의 산소를 다녀오는 동안 내내 우리 부자는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녀석이 운전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옆자리에 앉더니 이내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서는 옅든 코까지 골면서 태평스럽게 잠든 모습에 짜증이 슬며시 밀려왔지만 때가 때인지라 번잡해진 도로 사정을 감안(勘案)하면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게 낫겠구나 하고 에둘러 생각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일 지금의 아들 나이쯤에 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면서 아버지께서 장시간 운전을 하고 내가 옆자리에서 태평스레 잠을 자고 있다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그런 가정만으로도 아버지께 불효를 드린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지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참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침과 동시에 너는 어쩔 수 없는 MZ세대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하는 서운하고, 조바심 나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편린(片鱗)들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혼란스러움에 한동안은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부자간의 좌석은 변함없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대화 한마디도 없이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몰입된 후부터는 너무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소용돌이치면서 안정감마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우드랜드에 들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 보면 혹시 뭔가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긴박한 생각이 들어서 차량을 급히 억불산 쪽으로 돌렸습니다. “여기가 어디예요?” 잠에서 부스스 눈을 뜬 녀석은 알 수 없는 눈앞의 풍경에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응 정남진 편백 숲 우드랜드라는 곳이야 아주 좋은 명승지란다 특히 너 같은 잠퉁이 녀석에겐 더없이 좋을 수도 있는 곳이거든 내려서 좀 쉬었다 가자” “네~~~!” 모든 나무 중에서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편백 나무가 빼곡히 차 있는 숲길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톱밥을 깔아놓은 산책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편백 특유의 그윽한 향취가 온몸에 휘감기는 공기의 청아함과 함께 코끝으로 확 끼쳐왔습니다. 10 여분쯤 걸어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데크길로 접어들었을 때 아이는 심호흡도 하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였고 나 또한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쯤 풀리는 듯한 청량함이 온몸으로 느껴져 왔습니다. 숲의 오묘(奧妙)한 힘과 자연의 무궁(無窮)한 능력에 동화되어 굳어있던 내 마음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고요하게 퍼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것은 편백 나무 특유의 향취 때문일 수도, 아니면 부모님 산소를 오랜만에 다녀온 불효자만이 느끼는 작은 뿌듯함에 연유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우리 부자는 어느새 손을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은 땀이 약간 배어 있어서 부드럽고 다사로운 느낌이었는데 그것 또한 편백의 향기가 우리 부자의 손과 손 사이로 슬며시 녹아들어 체온을 따듯이 올리고 있는 듯한 상쾌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나처럼 이런 기분일까) 녀석의 어두웠던 표정이 서서히 걷히고 잔잔한 미소가 얼핏 보일 때 관리실에서 전하는 말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이곳 전체는 금연 구역이니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극히 일상적인 내용의 안내 말이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녀석이 키득키득 큰소리로 웃더니 빠르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안내방송이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네요, 여기는 흡연지역이니까 산불 예방과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금연을 삼가 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요 하하하, 금연을 삼가라, 너무 재미있는 말 아닙니까. 흡연과 금연, 금연과 흡연의 조합이라니!”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그가 기분 좋았을 때 했던 특유의 익살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당연히 나도 평소 내 방식대로의 맞장구를 칠 수밖에요. “뭐 이 녀석아! 네놈 코가 호강한 대신 귀에는 감기가 온 모양이구나, 금연을 삼가라고? 그게 말이 돼? 흡연을 삼가라는 말이겠지!” “아닙니다, 분명히 금연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하하” “뚱딴지같은 궤변은 제 놈이 늘어놓고선 하하하하“ ”아니라니까요. 저 안내방송이 이빨에서 땀 냄새 나는 말을 하고 있다니까요. 안내방송도 1년에 한 번씩 실수하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입니다. 그것도 정월 초하룻날부터 했으니 1년의 액땜을 지금 하는 셈이라니까요, 하하하하!“ 나는 아이의 녹슬지 않는 상상력과 순간의 재치와 빠른 변화의 대처에 녀석이 아직도 여전한 익살꾼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아이에게서 받았던 서운한 마음의 빗장이 슬며시 풀리고 있음을 흐뭇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이는 순수했던 옛날의 그 눈빛으로 돌아왔고 나의 흐뭇해진 느낌과 아이의 본래대로의 돌아옴은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장 홍소(哄笑)로 이어졌습니다. 주변에 관광객들이 더러 있었지만 우린 웃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중지할 수가 없었지요, 우리의 호쾌(豪快)한 웃음소리는 바람과 함께 푸르고 푸르른 창공으로 나래를 펴면서 이름 모를 새와 함께 하늘로, 하늘로 높이 높이 솟아 올라갔습니다. 집을 나설 때 침울하게 시작했던 성묫길이 유쾌함으로 순식간에 바뀐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 준 선물이 아니겠는가. 역시 우드랜드는 탁월한 선택이었고 웃음은 만병통치약이 확실해!) 나는 점점 만족한 표정으로 변해갔고 한바탕 웃음으로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달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습니다. ”아버지 이제부턴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사실은 어젯밤 온전히 잠을 못 잤습니다. 모처럼 아버지를 뵙고 수척해지신 모습이 아른거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고요 그러나 우드랜드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까 정신이 명료해졌습니다. 그래서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정월 초하룻날인 오늘부터 정말 금연하겠습니다, 아까 할아버지 산소에서 아버지의 희망 사항인 금연하기를 저 자신과 명예를 걸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녀석의 뜻밖의 고백에 콧날이 급격히 시큰해졌습니다, (어, 어? 이건 편백 나무의 진한 피톤치드 때문만은 아닌데 말이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찡해진 내 콧속으로 편백 나무의 한없이 기분 좋은 향취가 흠씬 밀려왔고 녀석의 손은 한층 더 다사로운 온기를 나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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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슬링 사랑김상훈 수필가 작년 10월 가을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주말의 어느 날, 친구 우경(愚耕)이 누런 사각봉투 하나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속엣것을 꺼내 보니 익살스러운 안동 하회탈을 형상화해서 만든 짙은 갈색의 목제 타이슬링 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외출할 때 일일이 넥타이를 매번 매기도 번거롭고 시간도 걸리고 해서 두어 개의 타이슬링을 구한 뒤 그때그때 분위기나 기분에 따라 사용해보니까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내가 아무래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까 자기와 외출할 때는 매지 않은 것이 좋겠다고 해서 좀 어정쩡함을 유지하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회탈 타이슬링을 본 순간 내 취향에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경의 얘기인즉슨 이렇습니다. 안동의 충효당에서 열린 전국 종가(집) 모임에 갔을 때 (그는 홍주송씨 이요당파 광길종가 12대 종손임) 거기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안동의 상징이랄 수 있는 하회탈 타이슬링을 하나씩 선물하더랍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나서(라기보다는 우경 특유의 장난기 발동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주최 측에다 하나를 더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더 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꼭 한 개가 더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끈질기게 요구했더랍니다. 우리 형제는 쌍둥이이고 이번 행사에는 형편상 동생이 참석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심한 감기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선물을 나만 가지고 가면 동생이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참석하지 못했음에 몹시 서운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받은 선물을 동생에게 주기도 쉽지 않으니까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는 간곡한 얘기 끝에 어렵게 하나를 더 구했다는 겁니다. 나는 그의 기지와 익살이 신통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우경을 만날 때는 어김없이 기분 좋은 사연이 있는 이 타이슬링을 매겠다는 약속을 그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우경과 내가 같은 타이슬링을 한 것을 우연이 본 심송(尋松)이 어떻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착용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경은 여차여차해서 그렇게 됐어, 라고 얘기했을 때 그 설명을 듣던 심송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매고 있으니까 보기에 참 좋네, 하면서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 후 한 달여쯤이 지날 무렵 나는 또 하나의 타이슬링을 선물 받게 되었습니다. 심송이 인근의 중고등학교 교장단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안동의 도산서원엘 여행했는데 은악양선(隱惡揚善, 남의 나쁜 점은 덮어주고 좋은 점은 널리 알린다, 중용에서 유래). 이라는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 글이 새겨진 네 모 반듯한 철제 타이슬링을 내게 선물 한 것입니다. 나의 성향에 꼭 맞을 것 같아서라는 정겨운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 후, 나는 우경을 만날 때는 하회탈 제품을, 심송을 만날 때는 은악양선을 가능한 한 매기로 작심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두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며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의이며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사연이 깃든 선물을 받은 나로서는 두 친구에게 알뜰한 믿음으로 보답하고 동시에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고마움의 증표로 보여지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타이슬링의 편리한 점은 넥타이보다 간편해서 좋고 한겨울이나 여름철에 굳이 정장을 안 해도 어지간한 자리에는 결례가 되지 않으며 티셔츠나 스웨터를 입을 때에는 목 부분을 좀 조여서 착용하면 추위를 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또 여름철에는 늘어져서 볼품이 한창 떨어진 감추고 싶은 목주름을 슬며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어서 두루두루 좋았고요, 그뿐만 아니라 내가 타이슬링 한 것을 본 지인이나 이웃들이 참 잘 어울린다, 당신의 스타일과 매치가 되어 되게 좋게 보인다, 어디서 구했느냐 글씨의 뜻은 무어냐 등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설명과 대답을 할 수 있어서 친구들께 받은 선물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돈의 액수로 친다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나로서는 절친에게서 받은 이 안동산(安東産) 타이슬링은 갈수록 나의 최고의 깔맞춤과 액세서리가 되어서 외출할 때마다 늘 같이하고 있음을 매양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고 아내도 이제는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타이슬링을 착용하고 외출한 후 귀가했을 때는 어김없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줄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나만이 사용하고 있는 상자에다 정성들여 보관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가 그리 중해서 그토록 애틋하게 깊은 장롱 속에다 모시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을 때도 더러 있지만 앞으로 나는 줄이 낡았거나 헐거워져서 타이슬링 으로써의 기능을 조금씩 잃어간다고 할지라도 고지식하고 융통성 부족한 내 방식대로의 보관법을 견지(堅持)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친구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살아갈 날들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생존의 엄중함이 진득이 떠 오를 때마다 타이슬링에의 애절함과 애정함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리라고 여겨집니다. 나의 생이 다 할 때까지 좋은 친구들과 같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듯이 그 마음과 행동의 매개체인 이 타이슬링은 내 삶의 소소한 기쁨과 여유로움을 나에게 알려주는 생명줄로써의 존재임을 명증(明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갈수록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워짐을 실감하고 있는 요즈음의 기상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행복의 전달자인 두 친구에게 그 수혜자인 소월정(笑月亭) 주인이 보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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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나물을 캐면서김상훈 수필가 향일암의 진산 금오산(金鰲山)으로 해쑥을 캐러 왔습니다. 청정! 그야말로 무공해 지역입니다. 와서 보니 쑥뿐만이 아니라 고사리, 왕고들빼기 등이 지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맘때면 봄나물을 캐러 갔었는데, 올해도 변함없이 금오산을 찾았습니다. 아내만이 알고 있는 명당자리는 햇나물들이 군락을 이룬 채로 우리를 반겨 줍니다. 올해는 특별히 친구 부부를 은밀히(?) 초대했습니다. 친구 부인이 대단한 요리 솜씨를 가진 분이라 동행을 권유했더니 흔쾌히 승낙한 것입니다. 오늘은 친구 부인께서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두 가족이 같이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순천의 명주 ‘나누우리’ 막걸리를 반주로 곁들어 마셨더니 입이 알아서 절로 흥을 돋웁니다. 두 분 여성은 막 돋아나는 해쑥을 캐고, 친구와 나는 고사리와 왕고들빼기를 끊거나 캡니다. 나는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큰소리로 맘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그 느낌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호남의 비타민이며 호남인들의 영원한 얼과 흥이 버무리 되어 있는 그 유명한 판소리 단가인 “호남가”를 토해냅니다. 내가 최고로 기분이 좋았을 땐 어김없이 입에서 거의 무방비의 상황으로 튀어나오는 흥얼거림입니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 갈 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태인 하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 하니 삼태육경이 순천 심이요 방백 수령은 진안군이라. 앞에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너른 바다! 뒤에는 그 유명한 금거북이라는 뜻의 금오산!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잔잔한 바다 위로 하얀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통통배들, 녹색 수액을 가득 머금은 여린 나무 끝에서 전해오는 새싹들의 움틈의 현장, 크고 작은 온갖 섬들이 금거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도열 해 있는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정말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옛글과 함께 상큼한 시상이 떠오릅니다. 산과 바다, 그리고 섬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물빛, 산빛, 하늘빛이 고즈넉하게 물들고 있는 남녘의 해안 풍경은 포근하고 정겹고 안온합니다. 아! 오늘은 그야말로 눈과 입, 그리고 코와 귀 등 신체의 모든 구멍이 활짝 열리어서 건강한 기쁨을 호흡하니 온종일 호사를 누리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고, 좋은 음식이 있고, 좋은 풍광이 있으니 이 또한 흥얼거리는 것이 제격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졸 시조 「향일암」입니다. 향일암 향일암 가는 길은 내내 꿈길 이어라 좌우의 온갖 바윈 거북 등 무늬여라 거무산 직벽 바위는 영험한 기도처라 관음전 연리근엔 손 맞잡은 젊은이라 두 손을 맞잡으니 사랑의 노래여라 댕그렁 풍경소리는 그들만의 축복이라 해넘이 노을 속엔 만선의 통통배라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어라 고사리 여린 잎맥엔 봄빛 설핏 얹혔어라. 註 : 거무산은 금오산의 옛 이름. 산에 산림이 울창하여 검게 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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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정 부부 상경기김상훈 (수필가) "오메, 서울은 여름에 가도 춥다든디 어쩐다냐?" 이 말은 우리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 서울이라는 곳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가끔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 흔히 알려진 대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각박한 서울의 인심을 가장 울 엄마식으로 표현했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울깍쟁이라고 사뭇 자기 고향이 더 낫다고 합리화 시키던 시절에 울 엄마의 자존감과 해학과 풍자가 버무려진 서울이라는 곳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표현 방식의 하나입니다. 이렇듯 여름에 가도 춥다는 서울을 한겨울인 12월에 저희 부부는 다녀왔습니다. 참고로 전날의 엄청난 바람과 다음날의 기습 한파는 올해 들어 최고 추위인 영하 9도, 체감온도는 15도라고 방송에서는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서울 여행의 목적은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불어 조절성 인공장치를 삽입하여 근거리, 원거리를 훤히 볼 수 있게 하는 눈 수술을 받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친구 부부가 몇 년 전 이 수술을 했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고 안경을 쓰는 불편함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다고 해서 그 병원을 소개받은 것입니다. 나의 심각한 눈 상태와 아내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글을 읽고 쓰는 불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서울의 유명 안과병원을 찾은 것입니다. 예약 시간은 오후 2시, 3시간 반 이상의 온갖 검사를 받은 뒤 원장님의 감동적인 기도와 함께 왼쪽 눈부터 수술하였습니다. 수술 시간은 약 15분 정도로 수술 후 우리 부부는 네 개의 눈이 졸지에 두 개로 줄어드는 외눈박이로 깜짝 변신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왼쪽 눈에 안대를 하나씩 붙였는데 그 불편함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우선 걸을 때 눈앞의 원근과 바닥의 높낮이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고, 한 눈으로 보는 낯선 서울의 휘황찬란한 거리는 우리 부부에겐 생전 처음 보는 괴물로 보였습니다. 주변의 호텔은 비싸니까 신논현역 근처 교보타워 반대편에 있는 ‘N 호텔’을 소개받아 병원 문을 나설 때의 시각은 밤 6시가 막 지나고 있었습니다. 친절한 병원 여직원이 택시를 이용하면 곧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곧바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한쪽 눈을 통해 다가왔습니다. 그 모질게 추운 바람과 수많은 인파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부심이 심한 네온의 불빛과 자동차 경적은 1분도 안 되어 우리 부부를 완전한 이방인, 아니 예외 없는 전쟁고아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서울의 심장부 압구정역 3번 출구 앞에서 우리는 버려진 노인처럼 절망의 절벽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아내가 옆에 있는지(손을 잡고 걷기는 불가능했습니다.)를 열심히 확인하며 떠밀리듯이 움직이면서 질주하는 택시를 잡으려다가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택시를 잡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수로 저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눈 좀 고쳐서 편히 살려다가 그냥 거리에서 객사할 수도 있겠다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꽉 막힌 고정관념에다 그것에 몰입하는 집요함, 반드시 택시를 이용하라는 병원 여직원의 말에 함몰되어 다른 경우는 손톱만큼도 고려해 보지도 못한 편협함이 우리 부부의 고난을 가중하고 있었습니다. ‘N 호텔’을 소개하고 있는 유인물을 보이며 도움을 청했을 때 대부분의 서울시민은 무심하고 귀찮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렇게 헤매기를 30여 분, 마침내 어느 친절한 여성 한 분이 여기는 택시 잡기가 불가능한 지역이니 1442번(?)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신논현역에서 내리면 교보타워 반대편에 우리가 찾는 호텔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살길을 찾았습니다. 오, 나의 구세주여! 나의 마돈나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쟁 못지않은 역경과 고난 끝에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7시 20분이었습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추운 길바닥에서 외눈박이로 1시간 이상을 헤맸던 것입니다. 거리상으로는 겨우 2.5km밖에 되지 않은 머지않은 길을 말입니다. 호텔에 와서 정리해 보니까 택시 잡기는 아예 불가능했고 전철과 버스를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그놈의 택시만 잡으려고 했으니 하여튼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촌놈은 어디를 가도 촌놈이라는 자각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지쳐서 넋이 나간 듯 별로 말이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왔다 해도 얼굴을 씻지도 못하고 안대 또한 떼지도 못한 채 테가 굵은 수면용 안경을 쓰고 자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오른쪽 눈을 마저 수술하려고 호텔을 나와 병원으로 갈 때는 많은 택시가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제기랄, 이렇게 평온한 거리가 어젠 그렇게 삭막하고 비열한 생과 사의 현장으로 군림했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기가 막혔습니다. 영하 9도의 추위쯤은 전날의 고행에 비하면 깜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왼쪽 눈과 똑같은 검사를 한 다음 오른쪽 눈을 수술하였습니다. 끝난 시각은 오후 1시쯤, 우린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귀가하였습니다. 1박 2일의 서울행은 눈이 밝아진 대가를 혹독히 치른 하나의 사건이었고, 한바탕의 꿈을 꾼 듯 야릇한 기분이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씩 소염제, 항생제 등 세 개의 점안액을 넣고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특히 밤에는 모든 빛이 달무리처럼 둥글게 보여 밤 운전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뭔가 하나의 절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꼭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온몸으로 실감한 종횡무진 우리 부부의 상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