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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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우를 받는 이 나라는 美친 교육을 꿈꾸다. 덴마크 교육현장 - 세 번째 이야기부모의 욕망이 아이들의 꿈을 낳는다. 요즘 수도권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과대학 진학반을 모집하여 수학 수업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차츰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왜 의대를 가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할까? 수학을 조금 못하면 의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평소에 인간애가 넘치고 봉사 정신이 투철한 학생이 의대에 가면 문제가 생기는가? 그런 학생이 의대에 입학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없고, 수학이나 영어를 잘 해야만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가? 아직도 우리 국민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불평등지수와 차별지수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더욱더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덴마크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라는 팸플릿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신이 낳은 아이가 당신 개인의 아이일 뿐 아니라 바로 덴마크의 소중한 국민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국가에서 출산비, 출산휴가, 육아보조금, 교육비, 의료비까지 아이의 인생 전반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그야말로 우리 가족만이 아닌 온 사회가 아이를 함께 키우는 사회구조이다. 출산이 즐거운 덴마크 엄마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덴마크는 아이를 낳아도 엄마들이 걱정 없다. 아이는 부모만이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덴마크의 산모는 산전 6주부터 직장에서 휴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산후 1년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부모가 각각 1년씩 출산휴가를 신청할 수 있어서 2년 동안 부모가 아이를 집에서 직접 돌볼 수 있다. 유급휴가 때는 평소 월급의 80% 정도를 급여로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 회사는 산모를 대신해서 일하는 임시 직원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1년 후 직장에 다시 나갈 때는 아이의 돌봄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 유아원이나 동네의‘개인보모’에게 맡기면 된다. 대체로 퇴근 시간이 오후 4시 반 정도이니 식당, 카페, 쇼핑 센터 어디에도 쉽게 외출할 수 있다. 혹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부부가 아이를 돌아가면서 돌봐주거나 동네에 있는 아기클럽에 맡겨 서로 보살펴 준다. 그렇다면 부모와 정부는 어떻게 유아를 함께 관리할까? 덴마크에서는 출산 후 부모가 2년 동안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 양쪽 부모가 각각 1년씩 출산휴가를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부모가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시청이나 군청에 신청하면 집에서 가까운 유아원에 배정해 준다. 유아원에 내는 비용은 부모의 소득에 따라 차등으로 내는데 절반 정도를 시나 군에서 보조해준다. 혹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1년에 12주, 양 부모 합치면 24주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때문에 덴마크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에 큰 부담이 없으며 육아문제로 직장을 포기하는 일도 거의 없다. 덴마크는 정부가 아이를 낳는 일도, 키우는 일도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육아 제도를 보면 "역시 아이들은 미래의 자산이다”라는 말을 공감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만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줌으로써 아이를 사회 전체가 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생후 2년간은 부모가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있어야 하며,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시설 또한 확충해서 부담 없이 맡길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대학 입학은 어떻게 할까? 대학은 꼭 필요한 사람만 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자식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온 가족이 가슴을 태우는 일은 없다. 덴마크에서는 초등학교에서 8학년까지는 시험이 없으나, 8학년에서 예비시험이 한 번 있고 9학년이 되면 본시험이 있다. 그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인문고등학교, 기술학교, 상업학교로 진학을 결정한다. 60%가량이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기술이나 상업학교에 입학한다. 덴마크 청소년은 9학년 정도의 나이(15세)가 되면 매우 독립적이다. 부모는 아이의 진로에 대해서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치른 시험 결과를 가지고 부모, 학생, 교사가 면담을 해서 진로를 결정하는데 부모들은 대부분 교사의 진학 안내를 받아들인다. 특히 인문고등학교, 직업학교 어느 쪽으로 진학하든 그것이 아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적성과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혹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에 나갔더라도 나중에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는 대학 정원의 5% 정도는 늦게 공부하는 사람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렇지만 직업학교만 나와도 생활이 보장되고 취미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부모가 아이를 죽도록 공부시킬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덴마크는 가능하다. 좋은 직장이나 직업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의사에 못지않게 벽돌을 잘 쌓는 전문가를 존경한다. 불행한 의사보다 행복한 청소부가 낫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당연히 벽돌공과 의사의 보수는 다르다. 그렇지만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누진과세를 적용하기에 보수가 많건 적건 결국 실수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왜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가? 좋은 대학이 바로 더 좋은 직장이나 직업으로 이어지고, 더 좋은 보수와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로 연결되어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덴마크처럼 벽돌공이나 의사나 생활수준이 비슷하고, 페인트공이나 법률가나 실수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도 대학에 목을 매지 않을 것이다. 소득의49–60%가 세금이지만 혜택이 모두 돌아와 저항 없어 덴마크의 소득세는 49–60퍼센트다. 조세저항이 생길 법도 한데, 그 혜택이 모두 돌아오니까 충분히 세금을 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덴마크도 직업에 따른 사회적 신분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직장에서건 어디서건 거의 누구나 직함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만나는 여가클럽에서는 누구나 동등하게 어울린다. 벽돌공이나 사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대학을 나와서 특별히 학식이 많다면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직업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덴마크는 출산, 양육, 대학입시, 직업차별의 걱정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음에 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며, 아이의 장래 직업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다만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 그 분야로 나가 직장 생활을 하길 바랄 뿐이다. 명문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보수, 더 안락한 삶으로 이어지는 등식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람 사이에도 서열이 없으며 직업에 따른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다. 이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교육은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과정이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주고, 다른 사람과 팀이 되어서 일할 수 있는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도 삶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 위 글은 '대한민국 엄마들이 꿈꾸는 덴마크식 교육법'(김영희 지음, 명진출판사)의 자료를 활용하여 요약하고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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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덴마크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우린 오래 전부터 그래 왔고 오랜 후에도 사교육과 씨름을 할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뿌리에는 서열구조와 불평등 그리고 차별이라는 삼형제가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처럼 서열이나 경쟁을 요구하지 않고도 잘 사는 나라는 없을까? 다행히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가르치고, 획일화된 교육이 아니라 자율성을 키워주는 교육을 실행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덴마크의 교육에서 우리 교육 개혁의 단초를 찾아보고 싶다. 우선 덴마크 교육은 일등이나 꼴등이라는 등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들 모두의 개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경쟁보다 협동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두 살 반 혹은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유치원에 다니고, 그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9년을 더 다닌다. 이 과정을 마친 후에 학생의 진로를 결정한다. 진로는 어떻게 결정할까? 덴마크의 교육방식은 등수를 정하는 것이 아닌,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하여 아이의 장단점을 기록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등학교에서 8학년까지 시험도 없고 석차를 매기지 않지만, 담임 교사는 과목별 학습 능력이나 사회성의 발달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이게 아이들의 성적표이며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학교수업 이렇다 보니 상위권이 따로 없는 교실을 운영한다. 그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러 가지 능력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할 뿐, 운동을 잘하는 아이, 만들기를 잘하는 아이, 노래를 잘하는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등 개인마다 타고난 소질과 능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한다고 특별히 칭찬하거나 시상도 하지 않으며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모두가 개성 만점으로 당당하게 생활한다. 수업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진행한다. 매일 쏟아지는 지식을 가르칠 수 없기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그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교육부장관은 ‘학교교육 목표가 학생들에게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다음으로 덴마크는 혁명을 통해 서열 의식을 깼다는 점이다. 덴마크도 우리나라처럼 1950년대까지는 서열 의식이 있었다. 덴마크의 평등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1968년 학생 시위의 영향을 받아 학생혁명이 있었다. 이것을 분기점으로 덴마크에 평등의식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사회 전체가 서열의식을 깨게 되었다. 이렇듯 불평등과 서열 의식을 없애는데 사회구성원의 의식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좋다’와 ‘명문’이라는 단어에는 서열 의식이 숨어 있다. ‘좋은 학교, 명문 대학, 좋은 직업’에는 학교라는 서열, 직장이라는 서열, 신분과 보수의 서열이 있기에 높을수록 혜택을 많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덴마크의 부모는 아이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대등하다. 즉 아이들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평등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으며, 학교나 사회에서도 차별 없는 평등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 분위기가 개개인의 우열을 나누기보다는 능력과 소질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학교 간 서열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직업에 따른 사회적 신분과 보수의 차이도 많지 않다. 이런 평등한 사회이다 보니 부모나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덴마크는 ‘왜’라는 질문에 익숙한 사회라는 점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할 때 왜 하는지 꼭 질문하게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왜’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며 성장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더불어 다른 사람을 쉽게 부러워하거나 남이 하는 대로 쉽게 따라 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도 ‘왜’라는 질문이 아이의 사고를 넓히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결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성적 올리기에 급급한데 ‘왜’라고 질문하고 있으면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꾸중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한편 열아홉 살이 되면 부모는 아이들을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가 수평적인 인식과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다 보니 스스로 언행에 책임을 지게 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일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장려하기에 아이들이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기대지를 않는다. 간단한 간식 만들기, 세탁기로 빨래하기, 옷 입기와 벗기 등등 무엇이든 독립적으로 할 수 있도록 권장하기에 빨리 성숙할 수밖에 없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교육혁명 꿈꿔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특히 무슨 일이든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오직 취업을 위한 공부만 하다 보니 스무 살이 넘어도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 같은 일을 할 줄 모르는 학생이 많다. 특히 이색적인 것은 덴마크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1년에서 3년여 정도 여행이나 취업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덴마크는 일등과 꼴등이라는 등수가 없는 나라, 서열의식이나 불평등, 차별이 없는 나라,‘왜’라는 질문이 허용되는 나라 등 우리 교육이 통찰해볼 부분이 많다. 국민과 정부는 말로만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강조하지 말고 온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할 수 있도록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작은 물방울은 바위를 뚫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도 쉬지 않고 떨어지다 보면 바위를 뚫을 수 있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위침(磨斧爲針)의 한자성어가 있다. 모든 국민이 교육의 큰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서 도끼로 바늘을 만드는 교육혁명에 함께하길 바라며 '美친 교육'을 꿈꾼다. ※ 위 글은'대한민국 엄마들이 꿈꾸는 덴마크식 교육법'(김영희 지음, 명진출판사)의 자료를 활용하여 요약하고 정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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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을 부추기는 사회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국민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처방전을 써보고 싶다 행복이 뭘까. 심리학자 네틀의 말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얻은 행복감은 다른 모든 사람이 선택한 것에 좌우된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조그만 차를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조그만 차나 심지어는 자전거에도 만족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 집단의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K씨 : 잘 지내시죠? 더불어 행복하시지요? Y씨 : 죄송하게도 행복하지 않아요.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오보 비상경계령,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회복지 및 의료 민영화 등등) 때문에 행복할 수 없어요. 차라리 뉴스가 없는 사회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린 왜 대다수가 K씨와 Y씨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집단이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빼버린 채 개인적 행복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사회가 온통 주관적인 행복만을 강조하며 모든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쉽게 말하곤 한다.“행복하지 않다고? 그건 네 탓이야?”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냐는 말투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라고 말할 뿐, 잘못된 사회제도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행복은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높은 행복 지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제도가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 개인이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불평등, 정신적 건강 등 행복에 미치는 요소들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 나라를 살펴보자. 북유럽 국가들은 행복지수가 대체로 높다. 이는 국가가 국민에게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제공하여 보호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기에 다수의 국민이 경제 및 사회 활동을 만족스러워한다. 반면에 미국식 사회제도는 어떠한가? 사회적 보호는 제한하고 경쟁만을 말하기에 국민의 행복 지수가 전반적으로 낮다. 국가는 사회의 기본제도를 강화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경쟁만을 부추기기에 국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사회나 권력이 요구하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으며 경제 및 사회 활동 또한 만족도가 낮다.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복지 지출비와 행복지수 간에 상관관계가 아주 높다. 이는 북유럽식 사회제도가 개인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보호를 해줌으로써 행복감을 높여준다는 의미이다. 많은 전문가도 북유럽식 사회제도의 장점을 강조하며, 미국식 사회제도는 개인의 경쟁만을 조장하여 사회적 불평등지수를 높이는데 악영향을 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삶에서 개인의 책임과 노력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인 사회적 안정감과 보호망을 갖춤으로써 국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개인과 국가가 상보적 관계를 유지했을 때 개개인의 경제적 불평등 지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율성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을 중요시하는 사회 문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중심적인 사회제도는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사회적 보호를 제한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킨다. 이로 인하여 국민의 행복 지수는 낮고 개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 또한 높지 않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행복론을 알고 있는가? 나이키의 ‘Just do it’과 맥도날드의 ‘enjoy more’라는 슬로건을 보라. 더 많은 행복을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한다. 그러면 곧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기주의적 행복 경쟁만을 호도할 뿐이다. 요즘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 행복의 집단 간 차이에 주목하며 사회적인 맥락에서 행복을 연구한다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 제도와 행복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연구를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연구의 공통점은 사회 개혁 없이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행복을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젠 국민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처방전을 써보고 싶다. 정부는 국민에게 개인 테두리 안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강요하지 마라. 더불어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가짜 행복론을 가르쳐서도 안 된다. 정부는 공동체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사회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안전망을 갖추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기득권층은 국민에게 진짜 행복을 안내하라. 정부와 기득권층은 국민 개개인이 노력하며 능력을 발휘할 것을 말해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완성하며 개개인의 보호망을 촘촘히 갖추겠다고 선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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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아! 우리 숨바꼭질 할래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생각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호기심은 꼭꼭 숨은 지 오래다. 호기심아! 머리카락이라도 보일 수 있도록 꼭꼭 숨지 마라. 우리가 동안 너에게 무관심해서 가슴 아팠을 거야. 이제부터라도 너를 사랑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이라고 했고, 아인슈타인은 ”나는 천재가 아니다. 다만 호기심이 많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정신적 욕구가 무얼까?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적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또한 다른 본능과 조화를 이룰 경우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영국의 작가 이언 레슬리는 저서 <큐리어스>에서 호기심이 ‘특질’이라기보다는 ‘상태’라고 말한다. 즉 호기심은 환경이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호기심에 불을 지피는 쪽인가, 아니면 호기심을 억누르는 쪽인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가정의 분위기, 교육 제도와 방식, 사회 문화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개인의 호기심을 권장하기보다는 방치하고 차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문화, 자율성을 상실했던 일제강점기, 상명하복과 권위주의가 살아 숨 쉬는 군사문화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인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기심 천국하면 유럽이나 미국 등 열린 문화를 지향하는 나라들이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 지수가 높은 나라를 보면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70%가 미국, 영국, 독일 세 나라에 집중되었다. 독일의 사례만 살펴보자. 독일은 누구나 호기심을 갖고 즐기는‘일상의 과학’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과학이 어렵고 복잡하며 나와는 거리가 먼 학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정부나 시민이 어린 시절부터 기초과학에 많은 돈을 사용하는 것을 눈먼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은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학교 밖에서 색다른 방법으로 과학을 만날 수 있는‘학생을 위한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 전역에 330여 개가 운영 중이며 참여하는 학생만 해도 70만 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독일은 학교 밖에서‘학생을 위한 실험실’을 운영하여 어릴 때부터 기초과학에 대한 흥미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교육 방법을 생활화하고 있다. 독일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연구소, 막스플랑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2만 2000명의 과학자가 독일 83개 연구소에서 기초과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과학자들의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를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기에 자신의 호기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카이저 교수는 ”이곳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연구에 대해 완전한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연구비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없기에 본인이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다. 그 결과 독일에서 한 해 발표하는 우수 과학논문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나오고, 독일 역대 노벨상 수상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33명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독일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끊임없이 하여 유의미한 결과로 보여주며 내실 있게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호기심보다 안정감을 중시하는 생활 풍토가 지배적이다. 학생들의 대학 진학이나 직업 선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98년부터 2015년까지 3대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들의 대학 진학 현황을 살펴 보면, 물리는 열 명 중 세 명이, 화학과 생물은 절반 이상이 의학 계열로 진학했다. 과학의 재목들이 과학자의 길을 버리고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언제까지 모험 대신 안주(安住)를, 선구자가 아닌 추종자(追從者)를, 창의적인 연구 대신 따라하기만을 할 것인가? 이미 밝혀진 것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권위에 의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학연이 실력보다 우선이며, 지연이 실력보다 먼저인 권위주의적 관행 또한 없애야 할 고질병이다. 공자는 말하지 않았는가?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항상 생각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생각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그 호기심이 꿈틀거려야 궁금한 분야에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그래야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 앞으로 호기심을 존중하며 지속적인 투자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됨을 명심해야 한다. 호기심은 꼭꼭 숨은 지 오래다. 호기심아! 머리카락 보이게 꼭꼭 숨지 마라. 머지않아 너랑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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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스티븐 잡스의 배움을 배워라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좁은 배움의 민낯이여! 배움을 다시 정의하라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 배움을 멈추는 것은 삶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것이요 자신의 독단만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배움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사라져버리고 졸업장만이 그 사람의 가치를 보증해준다. 이러한 속 빈 강정 같은 배움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편협한 교육 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환경에서 살고 있기에 배움과 삶의 질에 대하여 냉정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스티븐 잡스는 "stay foolish"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나는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스티븐 잡스는 자신이 어리석고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했다. 그의 겸손한 자세는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으며 현대인의 손과 발이 되어버린 스마트폰까지 선물하게 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공자의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라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의 가르침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자는 학습에 있어서 권위나 지위보다는 호기심과 질문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으며, 그는 누구나 모르는 것은 묻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갈등이나 차이에 생겼을 때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했으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게 하였다. 우리의 배움 내면을 살펴보자. 우리 사회는 졸업과 입학이라는 과정을 통해 직업 찾기라는 외길만을 안내한다. 개인에게 지식 총량만을 쌓을 수 있도록 가르칠 뿐, 개인의 호기심과 질문은 쪼그라들어 교실 모퉁이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좁은 배움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 왔다. 우리의 모습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조차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한 채 배움을 마친다. 이렇게 무사고(無思考)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면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이기적인 언행을 쉽게 하며 독선(獨善)적 삶을 일상화한다. 더 나가 이런 모습이 권위주의 얼굴로 드러나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끝없이 조장한다. 요즘 매스컴을 접하다 보면 좁고 잘못된 배움이 혹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위공직자들의 비상식적인 언행이 뉴스에 매일 오르내린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명문대학교 출신이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부터 정치인의 고압적 언행까지 누구를 위한 통치행위이며 정치인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렵다. 인성(人性) 없는 지식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정(人情) 없는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공공 기관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꽉꽉 막혀온다. 스티븐 잡스나 공자가 말했던 배움을 쉽게 간과할 수가 없는 이유이다. 우리 사회는 스티븐 잡스가 말한‘언제나 어리석음을 유지하라.’라는 명언을 곱씹어보아야 한다. 공자가 강조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의 가르침 또한 생활화해야 한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리 학력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더 큰 지혜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배움의 길을 끝없이 걸어가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거나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한다. 배움을 다시 정의하자.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배우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