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 맑음속초24.0℃
  • 맑음18.6℃
  • 맑음철원18.8℃
  • 맑음동두천18.2℃
  • 맑음파주15.3℃
  • 맑음대관령16.7℃
  • 맑음춘천20.7℃
  • 맑음백령도15.0℃
  • 맑음북강릉22.6℃
  • 맑음강릉24.7℃
  • 맑음동해19.8℃
  • 맑음서울19.1℃
  • 맑음인천16.9℃
  • 맑음원주21.8℃
  • 맑음울릉도15.5℃
  • 맑음수원17.9℃
  • 맑음영월19.9℃
  • 맑음충주18.8℃
  • 맑음서산16.9℃
  • 맑음울진17.3℃
  • 맑음청주22.3℃
  • 맑음대전20.5℃
  • 맑음추풍령17.0℃
  • 맑음안동20.9℃
  • 맑음상주21.5℃
  • 맑음포항23.4℃
  • 맑음군산16.8℃
  • 맑음대구23.4℃
  • 맑음전주19.4℃
  • 맑음울산17.5℃
  • 맑음창원19.5℃
  • 맑음광주20.6℃
  • 맑음부산18.4℃
  • 맑음통영17.0℃
  • 맑음목포18.1℃
  • 맑음여수18.6℃
  • 맑음흑산도13.9℃
  • 맑음완도19.6℃
  • 맑음고창16.7℃
  • 맑음순천17.3℃
  • 맑음홍성(예)17.7℃
  • 맑음19.3℃
  • 맑음제주19.0℃
  • 맑음고산17.4℃
  • 맑음성산16.9℃
  • 맑음서귀포18.7℃
  • 맑음진주19.5℃
  • 맑음강화14.3℃
  • 맑음양평20.7℃
  • 맑음이천20.0℃
  • 맑음인제17.3℃
  • 맑음홍천18.8℃
  • 맑음태백16.7℃
  • 맑음정선군18.3℃
  • 맑음제천16.9℃
  • 맑음보은19.0℃
  • 맑음천안18.9℃
  • 맑음보령14.0℃
  • 맑음부여18.6℃
  • 맑음금산17.3℃
  • 맑음18.6℃
  • 맑음부안16.8℃
  • 맑음임실18.1℃
  • 맑음정읍17.3℃
  • 맑음남원20.3℃
  • 맑음장수16.3℃
  • 맑음고창군16.0℃
  • 맑음영광군16.3℃
  • 맑음김해시19.2℃
  • 맑음순창군19.1℃
  • 맑음북창원20.5℃
  • 맑음양산시20.3℃
  • 맑음보성군17.9℃
  • 맑음강진군19.0℃
  • 맑음장흥15.9℃
  • 맑음해남17.2℃
  • 맑음고흥18.2℃
  • 맑음의령군21.9℃
  • 맑음함양군20.1℃
  • 맑음광양시19.5℃
  • 맑음진도군14.9℃
  • 맑음봉화15.5℃
  • 맑음영주16.7℃
  • 맑음문경17.8℃
  • 맑음청송군16.4℃
  • 맑음영덕18.9℃
  • 맑음의성18.2℃
  • 맑음구미20.8℃
  • 맑음영천20.0℃
  • 맑음경주시20.9℃
  • 맑음거창17.8℃
  • 맑음합천22.1℃
  • 맑음밀양22.1℃
  • 맑음산청19.8℃
  • 맑음거제19.2℃
  • 맑음남해18.4℃
  • 맑음19.4℃
기상청 제공
여수뉴스타임즈 로고
쥐꼬리 소동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쥐꼬리 소동

쥐꼬리 소동

김상훈.jpg

김상훈 수필가 

 

 

 

나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 답사 일번지 제1장 제1절에 소개된 강진이란 곳에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에 태어났습니다.

 

 

산자수명과 배산임수로 조화를 이룬 햇빛 맑고 물빛 고운 고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것은 언제나 자랑거리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쯤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우리는 쥐를 잡아서 자른 쥐꼬리를 학교에 가져오라는 선생님들의 독려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에 그 피 같은 곡식들을 쥐새끼들이 엄청나게 먹어 치우니 전 국가적으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어떤 방법으로든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친구는 쥐를 잡으려고 쥐구멍에 불을 놓다가 집을 홀라당 태워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흉흉히 들려오던 시절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각 학년과 학급으로 쥐꼬리 할당량을 정해주면 어떻게든 그 목표를 달성해야 담임선생님께서도 자유로웠고, 선생님으로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쥐꼬리를 많이 가져온 학생에게 더 신임을 보였던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 학생들은 웬 선사시대 고인돌 옮기던 이야기냐고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또렷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어린 날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쥐꼬리는커녕 쥐 털 하나도 확보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가야 했던 참담했던 월요일이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풀이 죽은 패잔병 꼴로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유독 내 짝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생글생글 웃는 품새로 보아 쥐꼬리를 많이 가져온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동시에 나는 아주 교활하고 음흉한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짝꿍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만 그 옳지 못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 이런!

 

 

내 기억으로는 생애 처음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당시에는 일진이니 짱이니 뭐 이런 말 자체가 없었던 시대였지만, 나는 반 친구들과 썩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잠시 빌려 온다는 몹시도 합리적으로 그래서 가볍게 위치 이동만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짝꿍 녀석이 쥐꼬리를 누군가가 훔쳐 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상황이 묘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반 친구들 전체를 집합시킨 선생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쥐꼬리를 훔친 놈은 속히 신고해라!" 나에게는 선생님의 말씀 중에 훔친 놈신고라는 엄숙한 단어가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신고해서 이른바 훔친 놈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내 위치가 심히 손상되어 앞으로의 모든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더욱 움츠리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 모든 아이를 책상 위에 무릎 꿇은 자세로 앉힌 후 눈을 꼭 감으라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쥐꼬리를 가져간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가져가지 않은 놈은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만일 실눈이라도 뜨는 놈이 있다면,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훔친 놈으로 간주하겠고. 시간은 딱 5분을 주겠다. 선생님의 말씀 중 달라진 부분은 훔친 놈에서 가져간 사람으로 말이 순화되었고, 눈을 뜬 사람을 눈을 뜬 놈으로 격하시켰다는 부분에 나는 마음이 조금쯤 편해지긴 했지만, 가슴은 이미 방망이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서 선생님께 잘못을 시인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이다. 따라서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은 용서할 것이다.

 

 

선생님의 음성은 어느덧 자애로운 아버지의 말씀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눈을 그대로 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뜰 것인가. 나는 점점 햄릿이 되어갔습니다.

 

 

졸렬한 저항이냐, 용감한 항복이냐. 선택은 오직 나! 김상훈. 너에게 달려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결정의 순간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든지 손엔 진땀이 나고 목은 갈증으로 타는 듯했지만 나는 결국 다음 행동을 결정짓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기로 말입니다.

 

 

그러자 의외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나는 이때다! 하고 눈을 크게 뜨면서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선생님께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시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친구들 전체를 책상에서 내려와 본래대로 의자에 앉게 한 다음 낮은 음성으로 말씀을 이어 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를 긴장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낮은 억양이었지만 그러나 크나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너희들의 노력으로 지난주에 우리 반이 전교에서 쥐꼬리수집운동” 1등을 하게 되었다.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여기서 끝낸다. 쥐꼬리를 가져간 친구도 다행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눈으로 선생님께 말했다. 쥐꼬리를 잃어버린 친구도 우리 반이 1등 하는데 크게 힘을 썼으니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자. 따라서 선생님 혼자서만 쥐꼬리를 가져간 학생을 알고 있는 것으로 하겠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알았나? 동의한다면 박수로 마무리하겠다. 박수!!“

 

 

우리는 선생님의 신속하고 공정한 문제 해결과 그 무거웠던 분위기에서 해방됨에 대해서 매우 다행으로 여기면서 짧은 대답과 긴 박수로 마침내 쥐꼬리 소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상은 1950년대 말 시골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한바탕의 소극(笑劇)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이제 고인이 되셨고 내 짝이었던 친구는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혜와 인내를 가르쳐 주셨던 그리움으로 내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 계시고 친구는 늘 미안함의 대상으로 가슴속에 남아서 보고 싶은 얼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