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여수 여양중학교 국어과 교사
그것을 거부해도 삶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반항이다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묵직하게 묻고 답한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의심이나 반항이라는 단어를 부정적 의미로 쓰고 있다. 차라리 순종이나 복종이라는 단어가 우리 몸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왜 그럴까? 어릴 때부터 삶이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 속에서 그대로 자라야만 성공할 것 같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없고 오직 타인과 관습만 있을 뿐이다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부터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까지 아이들에게 자유의 의지와 모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틀에 가두는 삶을 가르친다.
부모나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부터 모범생까지 다양한 칭호를 부여하며 정말 그 아이가 모범생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람과 사회를 대면하는 모습은 모두가 하나 같이 비슷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보다는 늘 다른 사람의 말과 사회의 통념에 맞추며 살아간다. 라캉의 말처럼 타자의 욕망 속에는 살아갈 뿐 나는 없고 오직 타인과 관습만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라. 어떤 일에 대하여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면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반대하고 반항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감히,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여태 돌봐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싫으면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구해. 어디서 큰소리야. 이 사람 좋게 보았는데 이제 보니 형편 없구만” 등등 강자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
아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명문대학교를 나와도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니 이게 삶의 비극이다. 어릴 때부터 정해진 길만 걸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육의 내용과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은가?
우리의 삶은 끝없이 변한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변한다. 그렇다 보니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식이 정답이 아니라 오답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교과서의 지식만을 통으로 외워 쓰기를 강요할 뿐 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개인의 삶이나 인류의 역사가 발전한 것은 바로 의심에서 출발했다.
그 의심이 들면 거부와 반항으로 이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노동자가 기업가에게 협상을 요구하거나 반대의 의견을 내는 것을 생각해보자.
만약 노동자가 기본 생존권마저 보호받지 못하고 기업가에게 절대적 가치를 침해당한다면, 그때는 노동자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기업가의 명령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반항이다. 그것이 거부는 해도 삶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반항과 거부를 어떻게 해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게 하고 모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동양 아이들보다 서양 아이들이 진취적이고 자율적인 이유는 그리스 신화와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유의 욕망과 모험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 교육의 방향 또한 아이들을 틀이나 단편적인 지식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자율과 모험 그리고 토의와 토론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하나의 정답 찾기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언제까지 찍기 교육만 행할 것인가? 오늘의 지식이 내일이면 틀릴 수 있는 게 현실이다.
홍길동전을 기억할 것이다. 적서차별과 사회 부조리에 대안을 제시하며 집을 뛰쳐나간 그의 거부와 반항의 몸짓에서 우리의 현실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홍길동의 작가 허균은 죽었지만 그의 인간 존중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반항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