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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끝나지 않은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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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끝나지 않은 아픔.

중학생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집으로 가다가 동네 형을 만났다. 함께 집으로 향하던 그 형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접어들자 얼굴 표정이 돌변하면서 우리에게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다.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는 날카로운 면도칼을 보여주면서.


불행하게 그날 아침에 나는 우리 어머니에게서 정말 어렵게 받은 돈이 있었고 그 날 그 돈을 몽땅 빼앗겼다. 

 

그 돈이 너무 아까워서 사먹고 싶었던 과자 하나 사먹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그 돈을 그 형에게 모두 뺏긴 것이다.


고등학교 때 교련시간이었다. 그 당시 교련시간의 대부분은 군대식 제식훈련과 분열연습을 하였다. 

 

호루라기 소리에 왼발을 맞추고 “좌향 앞으로 갓!”, “우향 앞으로 갓!”하면 손과 발을 척척 올리면서 절도 있게 걷는 연습이었다.


줄을 지어 걸으면서 앞의 앞사람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정확하게 맞춰서 걸어야 하는 연습이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연습을 하다 보니 싫증이 났다.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와 잠깐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걸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교련선생님에게 딱 걸렸다.


“너희 둘! 앞으로 나와!”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내 뺨에서 “철석!”하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세게 맞았던지 나는 몇 미터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내 코에서는 코피가 흘렀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온 몸에 분노를 느꼈다.


군 생활 때였다. 유독 후임들을 괴롭히던 선임이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좋아서 괴롭히고 기분이 나쁠 때는 나빠서 괴롭혔다. 그 당시는 군대 폭력이 일반화되던 시절이라 그 선임의 횡포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안 마주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피해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초소에서 그 선임과 단둘이 보초를 서게 되었다. 보초를 서는 두 시간 동안 얼마나 시달릴까 생각하니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별 이상한 암기사항을 다 물어보면서 모르면 모른다고 구타를 했다. 

 

마지막에는 고향이 전라도라고 맞았다. 그날 선임에게 엉덩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았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30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어딘가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꼭 그래야만 했느냐고. 나중에 혹시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았느냐고. 아니, 그러한 사실 자체를 기억이나 하고 있느냐고.


그 기억 중간에 5.18 민주항쟁이 있다. 같은 국민을 잔인하게 총칼로 죽였던 그 사람들에게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꼭 그래야만 했느냐고. 지금이라도 희생자와 유가족과 평생 트라우마를 겪고 사는 광주시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느냐고.


저들의 논리라면 600명의 북한 군인들이 어느 날 흔적도 없이 광주에 나타나 유혈사태를 저지른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말을 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에 동조하고도 국민과 5.18 유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진 않느냐고.


철제 곤봉으로 시민의 머리를 내리치고 선혈을 흘리며 쓰러진 학생과 시민을 군화발로 짓밟고 총검으로 찌르고도 마음이 괜찮았냐고. 그 어린 학생들이 북한군처럼 보이더냐고. 그렇게 학살을 하고도 당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고 39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항쟁을 폄훼하고 싶냐고.

 

 자유한국당은 그 엉터리 같은 모순과 망언을 끊임없이 정치적 인식의 토대로 삼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씁쓸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5.18 민주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와 행동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선한 행동이 많아지지 않으면 나쁜 행동이 그 자리를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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