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는 무뚝뚝하고, 화를 잘 내시고, 다정한 말씀 한마디 없으셨던 엄한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세 손녀들 칭찬을 할라치면 오히려 깎아내리기 바쁘셨다. 그리고, 종종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누워 계시길 잘했다. 당시엔 “할머니, 또 머리 아파? 왜 머리가 아파?”하고 묻지를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인식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할머니의 익숙한 모습이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았거나 할머니와 나와의 어떤 정서적 연결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앉혀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하신다든지, 따스하고 애정어리게 나를 대해 주신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이 불리워질 때는 아마도 동생들과 싸워서 혼낼 때, 또 할머니 가슴속에 쌓인 울화가 터져 나올 때, 집안일 시키거나 동생들 돌보라고 하거나 어떤 필요에 의해서 부를 때... 아마도 그 때 불리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고, 뭔가 어색함, 이질감이 느껴진다.
1년 6개월 정도 나이차가 나는 동생이 태어난 후, 나는 할머니 방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둘째 돌보랴 농사일 하랴 아마도 나는 엄마랑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할 새도 없이 할머니 손에서 더 많이 키워졌던 듯 하고, 무뚝뚝하고 불같은 할머니 밑에서 많은 눈치를 보며 자랐을 게다.
게다가 할머니가 너무 무서웠던 엄마와 아빠는 내가 할머니에게 혼날 때 전혀 보호도 해주지 않고, 혼나고 난 뒤에 어떤 위로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 나는 작은 골방에서 혼자 울었겠지. 그러다가 6~7살에는 이종사촌오빠가 광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가서 오빠 하숙을 시키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얼마 전에 집으로 돌아온 듯 하다. 그런데, 아빠는 언젠가부터 시름시름 앓고 계셨고, 내가 입학한지 얼마 안 된 봄날, 아빠는 돌아가셨다. 그런데, 엄마는 부모 앞에서 남편 죽었다고 우는 거 아니라는 사람들의 말에 제대로 통곡도 못하고, 애도도 하지 못한채 아빠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내가 대학 졸업한 후에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아빠에 대해서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내가 결혼해서 아빠 산소에 인사드리고, 벌초하러 가기 전까지 엄마는 생전 아빠 산소를 찾지도 않으셨다.
아빠는 우리 가족 안에서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되어 버렸고, 엄마는 아빠를 가슴에 묻고, 늙으신 어머니와 세 딸들을 위해 생존현장에서 고군분투하셨다.
그러나, 가슴 속 응어리진 한은 엄마를 세상에서 고립되게 만들었고, 그 외로움과 고립감을 할머니와도 나누지 못했고,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언니에게도 나누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하물며 딸들에게도 당신의 아픔을 얘기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엄마에게 잘해야겠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딸이 되어야겠다.’ 라고 다짐한 듯하다.
그러나, 엄마가 당신의 속마음을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셨기에 나는 엄마와 정서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할머니하고도 연결된 적이 없는데, 엄마와의 연결감도 경험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나도 또한 두 여동생들, 학교 친구들과의 연결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나의 삶 또한 고립된 섬처럼 늘 외롭고 힘겨웠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얘기조차 못하고 살았다.
내가 얘기할 수 있었던 상대는 그나마 간간이 있었던 학창시절의 단짝들, 말 없는 자연, 일기장,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만난 신랑과 인생의 선배들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외할머니가 왜 그토록 팍팍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는지, 왜 머리 싸매고 드러누운 날이 많았는지를 조금 가늠해볼 따름이다.
나는 국화를 참 좋아한다. 그 단아한 모습이며, 깊어가는 가을속에 피어나는 그윽한 향기를 사랑한다. 올해 나의 뜰에 국화를 들이고 나서 작은 시 한편을 써 보았다.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죽고 싶어도 가을국화는 이쁘다
몇 날 며칠 지리산을 쏘다니다 흙땅에 널부러져도
빨치산녀처럼 비바람 맞아
발은 퉁퉁 불고
머리는 쫄딱 젖어 미친년처럼 헝클어지고
허기가 져도
산행이 끝나고 사람사는 마을로 내려갈라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에 올라오면
나는 한 마리 선한 짐승
혹은 경계없는 그 무엇이 된 듯한데
저 곳으로 내려가면
어느덧 사람들과 부대끼고 갈등하며 사는 것이
더할 수 없는 손톱밑의 가시였다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무작정 오른 스무살의 지리산행
걷고 또 걸었지
남몰래 울고 또 울었지
근데 말없이 받아주는 어떤 기운 있어 그 품에 안겼어
내려가기 싫었지만 어째
돌고 돌아 세월은 흐르고
나는 어느새 이곳 지리산에 살고 있네
6.25의 아픔으로 인한 외할머니의 상처
남편의 죽음에 제대로 애도조차 못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한스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 안에 있다는 걸
이곳 상처많은 지리산 땅에서
알게 되었다
할머니도 엄마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하다못해 당신들의 넋두리도 듣지 못했던 나는
수천, 수만 날을 헤매고 헤매며 지금 이 땅위에 서 있다
노고단이 자리하는 뒷산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눈앞에 바라보이는 나의 뜨락
이제 여기 낙엽 떨어지고 들국화도 피어나니
내 뜰에도 국화 몇송이 들이고
이제는 머언 뒤안길 돌아온 나에게
그 꽃들을 바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