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화개로 서예 배우러 가는 날이다. 학기 초라 큰 아이 학교 상담을 마치고, 3시 즈음 구례에서 출발했는데, 피아골 입구 즈음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하더니 석주관 칠의사 사당 있는 곳부터는 거북이 걸음이다.
수업 시간에 너무 늦는 것 같아 좀 조바심이 났는데, 마음 급하게 먹어봐야 소용없는 일. 작년부터 1년 이상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너무도 답답한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도로로 쏟아져 나온 걸 이해해야지. 도로가 막히는 걸 체념하고 나도 차 안에서 꽃구경을 하며 차가 멈추면 이 기회에 사진도 몇 장 찍고...그러다가 차가 움직이면 뒤에서는 그새를 못 참고 빵빵거린다. 에고~~ 꽃구경 좀 하자구요! 꽃놀이 나왔으면서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지난주까지는 벚꽃 봉오리에 붉은 물이 잔뜩 올라 있더니 한 주 사이에 꽃이 팡팡 터져 버렸다. 비 오고, 햇빛 나더니 벚나무들도 몸이 가려워 그새를 못 참고 화사하게 꽃을 피워낸다. 그나마 꽃샘추위가 한 이틀정도 온 바람에 속도가 살짝 더뎌진 듯 하다.
허나, 4월이 오기 전에 봄꽃의 절정이라는 벚꽃마저 다 터져 버렸으니 어찌보면 참 속절없다. 꽃들이 천천히 하나씩 피어야 그 꽃들을 차분히 음미할텐데...
산수유 꽃 아래서는 산동애가를 읊조리고 매화 아래선 그 그윽한 향에 심취해 논을 감을 수 밖에 없을테고, 거기에 매화차 한 잔이면 말이 필요없을테고, 목련꽃 아래서는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보고, 진달래꽃 아래서는 소월의 진달래 시를 읊으며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난 님을 생각할까 말까?^^
어린시절, 온 산을 휘저으며 진달래 한아름 꺾어오던 볼 빨간 어린 소녀를 추억할 테고, 개나리꽃 아래서는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쫑쫑거리며 다니는 샛노오란 이쁜 병아리들을 생각하고, ‘개나리꽃 들여다 보면 눈이 부시네.
보국대 들어가신 아버지는 언제 오시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보국대 들어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가 생각나겠지. 그런데, 지금은 꽃들이 온통 짬봉으로 피어나 그런 걸 천천히 누리고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 듯 하다.
암튼, 벚꽃 필 무렵, 섬진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지금 이 쪽 편의 꽃보다 강 건너 꽃구름 이는 저쪽의 꽃들이 더 예뻐 보인다. 눈을 안으로 돌려 지금 내가 처한 이곳, 혹은 내가 가진 보물, 나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볼 수 있기를...
코로나로 수업을 중단했다가 지난주부터 오랜만에 다시 서예를 시작하니 손이 잘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붓글씨를 쓰며 차분하고 정갈해지는 이 느낌. 참 좋다! 어쩔 때는 가족들 저녁 챙기러 안 가고 계속 글씨만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붓글씨는 뭐랄까? 내게 있어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흐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수업이 끝나고 쌍계사 가는 길로 잠시 걸어갔다가 내려왔다. 오늘은 시간이 촉박해 7000보 정도 걸었다. 벚꽃은 사정없이 피어나고, 차들도 사정없이 다니고, 봄날도 사정없이 간다. 내가 좋아하는 화개골의 봄도 화살같이 날아간다.
오후 늦게 여수 사는, 신랑 아는 형이 놀러 오셨다. 신랑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자고 오는 산속에 텐트를 치고 같이 자겠다고 온 것이다.
오늘 우리집에 아들들 친구 네 명과 조카까지 와서 1녀 6남매의 저녁엄마 노릇을 하고, 나도 산 속에 올라가봤다.
큰아이는 먼저 올라가 있었고, 신랑이 밥과 반찬을 가지러 내려온 김에 둘째와 한달살이 하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주변은 나무들에 묻혀 어둡고, 신랑은 모닥불을 피워 고등어를 굽고 있었다. 하늘에는 반달이 휘영청 밝고 별들도 듬성듬성 이쁘게도 떠 있다.
산속에서 보는 달은 또다른 맛이 있네 그려. 저 달과 별로 시를 노래하고, 막걸리에 고등어 구이와 김치를 안주삼아 불멍을 하다가 10시 즈음 내려왔다.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자겠다고 해서 큰아이와 00이만 데리고 내려왔다.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꼬마 손님들은 집에도 안 가시고, 우리 집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며 빔으로 '해리포터 영화'를 보고 계셨다.
씻지도 않고, 방 청소도 안하고...에효~~ 그 시간에 방 정리 정돈하고 청소하는데, 힘들당. 꼬마 손님들은 11시까지 영화를 보시고, 그 중에 한 녀석은 영화가 끝난 시각에 숙제를 하시겠단다.
에고~~ 머리야! 숙제를 꼭 하겠다는 너의 책임감이 가상하여 오늘은 허락하노마는 다음에는 아니 되느니라! 그 아이가 숙제를 한다고 스탠드 등을 켜놓은 불빛을 의지해 나는 막내에게 '어린왕자'책을 읽어주고, 그 아이는 12시 즈음 숙제를 끝내놓고 꿈나라로 갔다.
오늘 하루 참 알차게 살았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