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훨씬 흘러간, 햇수로도 60년이 더 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 사랑채에 새하얀 머리의 상투를 튼 훈장님을 모셔와 서당을 열었습니다. 온 집안이 하늘 천, 따지, 공자왈. 맹자왈. 하는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하고, 그에 걸맞은 향긋한 먹 냄새가 코끝에 맴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팔이 하나도 없는, 그러나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잘생긴 어떤 분이 그의 부인과 함께 서당을 방문했습니다. (아버지나 훈장님께서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와 훈장님과 그분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의 부인은 붓과 조선종이(화선지)를 가방에서 꺼낸 후 유난히도 색깔이 곱던 연적에서 벼루에 물을 따라 먹을 갈았습니다. 그 자태는 어린 저의 눈으로 보기에도 쉬이 범접하지 못할 단아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1. 그분은 6·25전쟁 때 양팔을 잃은 전직 육군 고위 장교 출신임.
2. 그의 부인은 E 여전을 졸업한 엘리트 여성임.
3. 잘린 오른쪽 팔 끝에 붓을 매단 후 피나는 노력 끝에 붓글씨 쓰기에 성공함.
4. 전국을 유람하면서 자기의 글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글씨를 써 줌.
5. 작품값은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주는 것은 굳이 사양하지 않음.
대강 이런 내용의 대화 끝에 그분이 온 힘을 모으는 듯한 독특한 기합 소리와 함께 일필휘지한 글씨는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글이었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역시 그분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땀과 한과 눈물과 희망을 그, 네 글자에 담은 것입니다.
글씨도 그분의 성정처럼 아주 활달하고 군더더기 없이 강한 획으로 써진 글씨였는데. 그런데 그 두 번째 글자, 즉 엎드러질 전 자를 앞과 뒤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즉, ‘顚’ 이렇게 써야 맞는데, 앞의 참진(眞) 자를 뒤로 보내고 뒤의 머리 혈(頁) 자를 앞으로 보내 쓴 것입니다.
획의 앞뒤가 바뀌었으니 이것은 오자가 아니냐고 꼬장꼬장한 훈장님께서 지적했을 때 그분의 대처가 실로 놀랍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겁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그 글자의 획을 바꾸어 쓴 까닭을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굳이 변명이 아니고 창작이라라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만든 ‘자빠질 전’ 자입니다. 팔이 하나도 없이 잘린 놈이 글자 하나 거꾸로 썼다고 해서 뭐가 그리 대수랍니까? 넘어지건 자빠지건 앞으로 구르건 뒤로 구르건 그게 그거지 뭐가 문제랍디까? 이건 내 맘대로 만들어서 내 맘대로 쓴 글씹니다!"
정리하자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썼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엎드러질 전(顚) 자를 실수로 썼는지, 일부러 그렇게 썼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설명과 해명을 들었을 때 참 대단하고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자조 섞인, 그러나 힘주어 그 글씨를 쓴 배경을 설명하는 굵고 힘찬 음성에는 과거에 부하들을 통솔했던 유능했던 지휘관의 아우라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 기막힌 반전에 아버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상당한 촌지를 건네신 것으로 후일에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연 많은 휘호(揮毫)를 보존하지는 못했습니다. 몇 해 전까지 족보의 책갈피에 우리 6형제와 조카들의 생년월일시를 아버지께서 친필로 써 놓은 글과 함께 보관해 두었는데, 이 작품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작품만은 꼭 보존(保存)했어야 도리인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혹시 어느 순간, 어디에선가 분실된 이 휘호가 “칠전팔기”라는 그 글의 뜻과 부합하는 의미에서라도 꼭 기적처럼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칠전팔기란 끈기, 즉 끈질김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이 점점 퇴색하고 소멸해 가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전통을 잇고 보존해서 전승(傳承)해 간다는 선물과 같은 뜻으로 전달되어서 그들이 소중히 새기어보고 곱씹어보는 귀중한 한자성어로 길이 보전하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