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훨씬 흘러간,햇수로도60년이 더 된 이야기입니다.당시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 사랑채에 새하얀 머리의 상투를 튼 훈장님을 모셔와 서당을 열었습니다.온 집안이 하늘 천,따지,공자왈.맹자왈.하는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하고,그에 걸맞은 향긋한 먹 냄새가 코끝에 맴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양팔이 하나도 없는,그러나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잘생긴 어떤 분이 그의 부인과 함께 서당을 방문했습니다. (아버지나 훈장님께서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아버지와 훈장님과 그분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의 부인은 붓과 조선종이(화선...
가을!참 좋은 계절입니다.그렇습니다.때는 바야흐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고마비라는 사자성어는"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라는 뜻입니다.그러나 이 말의 어원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좀 특이하고 복잡한 이력이 있음을 곧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원래 흉측하고 야만적인 흉노족(匈奴族)의 침입에 대비해서 단단히 경계하지만 결국은 도적 떼에게 깡그리 털리고 만다는 절망적인 어휘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데,우리는 그 부분을 간과(看過)하고 아름다운 가을을 상징하는 좋은 의미의 말,즉,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
1988년5월7일,파리의 아침 날씨는 제법 선선했습니다.일찍 일어나서 오늘의 일정을 살펴보고 몇 가지 메모한 후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하고 생각하던 나는 마침내 치기를 발동시켰습니다. 내 생애 최초의 파리 여행인데,언제 또다시 올지 모르는 파리이니까,오늘은 나의 우상인 알랭 들롱처럼 한 번쯤 폼을 잡아 보자는 야심 찬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어젯밤 샹젤리제 거리에서 샀던 까르띠에 선글라스에 스위스 필라투스 산 정상을 갈 때 꼭 필요하게 여겨져서 집에서부터 가지고 왔던 연한 브라운색의 가죽점퍼를 입기로 했습니다, 웬 가죽점...
"인도를 다 준다 해도 셰익스피어 한 사람과 바꾸지 않겠다."이렇게 무례한 말을 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토마스 칼라힐(1795~1881)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던 당시 무덥기만 하고 콜레라가 창궐해서 생존조차 담보되지 않았던 인도를 두고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이 말을 들었던 인도인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물론 셰익스피어가 불후의 대문호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한 영국 지식인의 말치고는 너무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래서...
청나라의 황준헌은『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부엌에 불이 났는데도 정답게 처마 밑에서 지저귀고 있는 한 쌍의 제비"라는 표현으로 당시의 조선과 조선 민족을 비유했습니다. 그때 황준헌은 주일청국 참사관이었는데,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에게 준 이 책에 우리를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조선과 조선인을 빗댄 어휘 자체가 어딘지 점잖고 대인다운 체취를 풍기면서도 우리 민족을 은근히 감싸 주는 느낌이 듭니다. 제비는 자기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헌신하며 최소한의 먹이를 잡아먹지만,포악하거나 전투적인 성향이라곤 전혀 없는 철새라고 우...
1. 1910년8월29일. 2. 1945년8월15일. 3. 2019년8월2일. 우리 역사에서 위의 날짜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2번은 확실히 알겠는데,어라, 1번과3번은 무슨 날?대부분 이런 반응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호,통제라!그러니까1910년8월29일은 하늘도 땅도 슬피 울었고 조국의 산하가 치욕으로 점철되었던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입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을 빼앗고 손발을 꽁꽁 묶어 공포한 날.실제로 이날부터1945년8월15일까지 일제의 식민지 시대가 시작됐던 그야말로 치욕의 날인 것입니...
2008년10월의 어느날 설악산을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권금성을 가려면 케이블카를 타야 하는데 단풍철이라 수많은 인파들이 복작이며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긴 줄이 이중 삼중으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맨 앞의 탑승 대기자들도 지금 표를 구한다 해도 두어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거라는 한결같은 답답한 대답만을 하고 있었습니다.모처럼 맘먹고 아내와 같이 온 권금성인데 어쩌나 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표가 필요 하십니까?" 하는 굵직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내가 표를 드리지요" "네?표를요?" 여긴 야구...
온몸에 종창(腫脹)이 나서 요양을 하러 온 세조(조선의7대 왕)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어린 동자승 한 명이 지나갔습니다. 불러서 등을 씻게 한 다음,왕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을 동자승에게 준엄하게 일렀습니다. "너 임금의 옥체를 씻겨 주었다고 말하면 안 되느니라"라고 했더니 동자승도 웃으면서"임금님도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보았다는 말씀을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세조가 놀라서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에 돋아있던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또한,피부도 말끔 해가 졌고 종창은 완전히 치유...
클리프 리차드의 영화"Summer Holiday" (우리나라에선 틴에이저 스토리로 개봉했음)를 본 후 며칠간은 그의 매력 속으로 푹 빠져 공부고 뭐고 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17세 소년의 가슴속엔 온통 크리프 리차드의 멋진 모습과 그의 노래 그리고 그 아름다운 기타의 선율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달빛 맑고 산들바람마저 싱그럽게 불었던 그날 밤도 영화를 같이 보았던 친구와 나는"Oh.I need you. you need me.(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는 내가 필요해)"를 흥얼거리면서 거리를 헤매다가 딱 ...
내가 어떤 사람을 업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나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그리고 손잡아 주고 싶은 느낌이 들 때는 그 대상이 누구든지 나와 최고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설명 할 필요도 없이 싫어하고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을 업고 싶거나 안고 싶거나 손 잡아주고싶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관계의 범위를 좀 들여다보면 그 의미는 조금씩 다름이...